정겨운 고향 마을 같은 고장-충북 옥천 [이기자이 낮이밤이]

[마이데일리 = 이석희 기자]충북 옥천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는 노랫말 때문이다. 이 노랫말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바탕으로 만든 곡이다.

이렇듯 정겨운 고장 충북 옥천이다. '이기자의 낮이밤이'는 두번째 옥천 여행을 떠났다.

정지용 생가

1996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는 정지용 생가는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위치한다.

정지용 생가는 해금조치 직후 조직된 ‘지용회’를 중심으로 그 이듬해 복원했다. 정지용은 6·25 전쟁 당시 행방불명되고 정부는 그를 월북 작가로 분류해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 막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지용회는 해금조치가 있은 후 그의 생가를 허물고 지은 집의 벽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지용유적 제1호’임을 알리는 청동제 표시판을 붙여놓았다. 표지판은 생가복원 이후 생가 부엌 외벽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지용 생가는 방문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음을 가구로 알리고 있으며, 시선가는 곳 어디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부엌 등 생가를 돌아보노라면 잊혀져가는 고향집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생가의 툇마루는 기념촬영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정지용문학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의 대표작「향수」다.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며 그곳의 풍경을 그림 그리듯이 소박하고 따뜻한 시어로 잔잔하게 풀어냈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강렬한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이 작품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엮여 가요로 만들어져 또 다른 방식의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충북 옥천 출신의 정지용은 1920년대~1940년대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96년 문을 연 정지용문학관은 정지용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 전시실과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로비에서 밀랍인형 정지용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정지용과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존이다.

전시실은 정지용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게 시대적 상황과 그의 문학을 시대, 연도별로 정리해놓았다. ‘한국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에서는 시문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정지용 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외 정지용 시, 산문집 초간본 등 원본을 전시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생가와 문학관을 천천히 둘러보며 정지용 문학을 음미해보자.

육영수생가지

옥천 구읍의 한옥 ‘교동집’은 육영수 여사가 나고 자란 집이다. 허물어진 채 생가 터만 남았다가 복원을 마치고 2011년 5월부터 일반에게 공개됐다.

이 집은 조선 초기, 1600년대 김정승이 처음지어 살고 이후 송정승, 민정승 등 삼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알려져 있다. 삼정승이 살았다하여 ‘삼정승집’이라 불렸던 이 집은 육 여사가 태어나기 전인 1918년 부친 육종관이 민정승의 자손 민영기에게 사들여 고쳐 지으면서 조선 후기 충청도 반가의 전형적양식의 집으로 탈바꿈했다.

교동집은 풍수지리학 상 명당에 자리 잡은 집으로 알려졌으며, 집의 후원과 과수원을 합치면 2만6,400㎡에 대지 1만㎡ 규모의 집이니 규모면에서도 보통의 집 수준을 넘어선다.

생가는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마방이 있고, 대문과 마주보는 곳이 사랑채였다 한다. 사랑채 왼쪽에 건너채가 있었고, 사랑채를 돌아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집터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안채에서 왼쪽으로 행랑, 오른편으로 연당사랑, 뒤로 돌아 별당, 후원에 사당과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자 오른 쪽에 또 뒤채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바깥겹집 사랑채만 하여도 누마루, 바깥 사랑방, 안 사랑방, 사랑채 안방, 대청, 광, 다락, 식객들이 거처하는 방, 사랑채 전용부엌 등 당시로서는 상류층의 규모 있는 살림집이었다고 한다.

생가에 가면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에 설치된 전통창호를 유심히 살펴보자. 용(用)자 살창과 아(亞)자 살창, 완(卍)자 살창 등 사대부집 방의 창호를 장식하는 살대가 그려내는 문양이 아름다운 전통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옥천향교(충북유형문화재 제97호)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인 옥천향교는 1398년 태조7년에 창건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 시 불탄 것을 다시 재건하였다. 대성전에는 동·서 양무가 있으며, 공자를 주향으로 중국의 선현들과 조헌, 송시열 등 유림들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옥천의 유림들이 매년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2월과 8월 첫 번째 정일에 석전제를 올린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지방의 영재를 수용하여 윤리도덕을 강론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최고 학교로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홍도당을 비롯한 고직사 등 부속건물이 있다. 아궁이가 기둥 사이에 놓여 공중에 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옥천향교는 해설사와 동행 시에만 개방된다.

옥주사마소(충북유형문화재 제157호)

사마소는 조선시대에 지방고을마다 사마시 합격자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전곡 출납 등의 금융업과 의창 역할도 했었다. 사마시란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사마소는 옥주사마소 외에 괴산에 청안사마소, 경주의 경주사마소 3곳 뿐이다.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된 사마소는 옥천의 옥주사마소 뿐이다. 옥주는 옥천의 옛 지명이다. 옥주사마소에는 우암 송시열이 직접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로 오른쪽에 마루, 왼쪽에 온돌방, 부엌을 두었다.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본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비축 저장해 두던 의창 건물을 뜯어서 효종 5년(1654)에 세운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화인산림욕장

화인산림욕장은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입구를 지나면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메타세쿼이아 숲이 펼쳐진다. 화인산림욕장 산책로는 총 4km 정도로 입구에서 정상까지 오르막길이 이어지다 이후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산책로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수월하다. 산의 곡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일품이다. 숲 안에 자연스럽게 난 길이 있어 자연의 숨결, 생명력,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홍일상사 후지히노끼 정홍용 대표가 고향에 임야를 매입해 주말마다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숲으로 2013년 8월 6일 개장했다. 메타세쿼이아, 니끼다송, 낙엽송, 잣나무, 두충나무, 적송, 참나무, 구상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다.

이석희 기자 goodluc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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