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이주엽의 본격 가사 비평, '이 한 줄의 가사'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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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여동은 기자] 노랫말이 주인공인 책

작사가 이주엽의 첫 책이자, 한국에서 거의 처음 시도되는 가사 비평이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노랫말로 유명한 정미조, 최백호, 말로의 작사가이자, 20년 가까이 음반 기획자로서 일해 온 저자의 안목이 문장마다 빛을 발한다. 「행진」(들국화), 「가시나무」(시인과 촌장), 「선운사」(송창식) 등 우리 대중음악사를 빛낸 41개의 명곡을 골라, 해당 노랫말의 가요사적 의미와 감성의 계보, 시대적 배경까지 섬세하게 읽어 냈다.

가사 비평이라니 좀 의아해할 독자도 있겠다. 한국에는 훌륭한 대중음악 평론도 많고 책으로도 곧잘 묶여 나오지만, 의외로 가사에 주목한 비평은 드물다. 장르, 곡의 완성도, 가창력에는 많은 관심을 쏟는 평론가들이 종종 가사에 대해서만큼은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 한 줄의 가사』는 노랫말이 주인공인 책이다. 음악 평론에서 조연쯤으로 여겨지던 노랫말로 환하게 조명을 비춘다. 실제로 많은 명곡들이 가사만 따로 떼어 내도 흥미롭게 읽어 낼 수 있다. <회사 가기 싫은 사람 / 장사하기 싫은 사람 모여라(송골매, 「모여라」).> 이 재기발랄한 가사에는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이 담겨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 당신의 쉴 곳 없네(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이 섬세한 노랫말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져 있을까? 노랫말에 담긴 문학성, 독창성, 시대성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주제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즐겨 듣던 가요의 노랫말 속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우리 대중음악의 선구자들이 어떤 언어와 감성을 통해 새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는지 흥미롭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비추는 노랫말

뛰어난 노랫말은 시대상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새로운 감성을 연다.

송창식이 노래하고 최인호가 작사한 「고래 사냥」(1975년)을 보자.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이 노래는 <고래>를 우리 가요의 메타포로 처음 끌어들인 곡이었다. 청춘들은 <고래>(새로운 삶이 열리는 곳)를 찾아 <동해 바다>(세상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성소)로 떠나자고 외친다. 이 장쾌한 후렴구 덕분에 70년대 군부 독재하에서 숨죽이던 청춘들은 그나마 <정신의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들국화의 「행진」(1985년)은 또 어떤가.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전인권은 압도적인 샤우팅으로 <눈 내리는 시련에 맞서 오히려 두 팔 벌려 환호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주엽은 이 노랫말에서 <불운과 시련마저 축복으로 삼겠다는 청춘의 결기>를 읽는다. 이념과 도덕적 엄숙주의에 억눌린 시대가 저물고 <개인>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예고하는 뜨거운 외침이었다.

송골매의 「모여라」(1990년)도 빠질 수 없다. <회사 가기 싫은 사람 / 장사하기 싫은 사람 모여라.> 얼핏 보면 <땡땡이>들을 위한 찬가로 여겨질 만한 이 불온한 가사(<한국 사회에서 학업과 근로 의욕을 꺾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는, 실제로는 1990년대 개발도상국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근면의 세계>에 던지는 유쾌한 돌팔매질이었다.

한편 93년생 혁오는 <젊음의 상투적 꿈과 희망을 얘기하는 대신 삶의 피로와 권태를 호소한다>. 그의 대표곡 「TOMBOY」(2017년)는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춘들을 한 줄 노랫말로 요약한다.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 가는데.> 이주엽은 <시대의 아픔을 압축적으로 은유하는 이 슬픈 문장>에서 <시대에 저당 잡혀 있고, 행복과 자아실현은 기약이 없는> 청춘들의 신산한 삶을 읽어 낸다. 혁오의 노래는 <재앙에 가까운 집단 불행을 겪고 있는 또래 청춘을 위한 노래>이다.

대중음악의 선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이 책은 가사 비평인 동시에, 이주엽이 우리 대중음악의 선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읽힌다. 개개 음악인들이 차지하는 음악적 위상과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 내는 저자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북한강에서」를 부른 정태춘에 대해서는 <한(恨)과 그리움의 토착적 정서를 독보적으로 그려 온> 싱어송라이터로 정의하고, <가사의 문학성으로 따지면 한국 대중음악사 가장 앞줄>에 서야 한다고 논평한다. 「다시 부르는 노래」 조동진에 대해서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위대한 운문의 시대가 있었음을 증언한 뮤지션>으로서, 그의 음악적 세계가 <정물적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짚어 낸다.

또한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에 대해서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서성이던> 음악가로, 그가 부른 「가시나무」는 이라고 촌평을 남긴다. 그다음 비유가 백미다. 이주엽은 <믿음의 나라로 걸어 들어가 예술의 문을 걸어 잠근> 하덕규의 행보를 안타까워하며 <그는 신을 만났을지 모르나, 우리는 예술가를 잃어버렸다>고 탄식한다.

배호에 대한 촌평 또한 절묘하다. <배호는 그 자신이 하나의 장르다. 한 시대 가창의 표준을 만들었다. 노래 잘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였다. 배호처럼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 세상의 감정을 일정한 대역에 가뒀다. (……) 우아하고 근사한 배호의 포즈를 추종했던 수많은 남자들이 아직도 노래방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을 것이다.>

대중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명반 컬렉션

음악가들은 단편적인 곡으로 말하기 이전에 완결된 앨범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완성도 높은 앨범에서 명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은 각 노래 뒤에 해당 곡을 수록한 앨범에 대한 해설을 정리해 놓았다. 산울림 1집(「새 노래 모음」)과 2집, 김민기의 4장짜리 세트 앨범, 김광석의 유작 앨범 등 모두 우리 대중음악사의 명반들이자, 대중음악 애호가들이 반길 만한 귀중한 컬렉션이다. 한국 가요사의 걸작들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들은 각 꼭지 뒤의 명반들을 찾아 듣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 <수록 앨범>에는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흥미로운 사연들도 담고 있다. 음악가들의 창작 활동에 영향을 준 인물들, 음반의 제작 배경이나 에피소드,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레이블 등 본문과 따로 읽어도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 자신이 곡을 주거나 인연을 맺은 음악인들의 소소한 일화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가요사에 흥미를 느끼고 있거나,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는 독자들에게 남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사진=열린책들]

여동은 기자 deyuh@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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