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인터뷰] '렛미인' 이은지 "박소담과 더블, 부담보단 행복했죠"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꿈의 무대에 섰다. '난 언제 저 무대에 서볼까' 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 배우 이은지는 6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연극 '렛미인' 무대에 섰다. 꿈은 현실이 됐고, 우스갯소리로 "내 모든 걸 쏟고 그만둬도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이은지는 지금 감격과 행복에 차있다.

연극 '렛미인'은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와 외톨이 소년 오스카의 가장 매혹적이고 잔인한 사랑 이야기로 이은지가 연기하는 일라이는 몇 백 년 동안 소녀로 살아온 뱀파이어다. 이은지는 600대1의 주인공이 돼 그간 쌓아뒀던 내공을 폭발시키고 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에너지는 이내 무대 전체를 채울 정도로 크게 다가온다.

이은지는 "꿈이 현실이 되니 너무 감격스럽고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작품. 주인공으로 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큰 무대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신기하다.

올해 나이 스물아홉. 어떤 친구들은 결혼도 했고, 대학 동기들 중엔 연기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 취직한 이도 있다. 지난해 진행된 '렛미인' 오디션 당시 이은지는 한창 고민이 많을 때였다. 스물여덟살, 대학 졸업 후 4년여간 연극 무대에 서왔고, 연기를 평생 할 생각이긴 했지만 어떤 방향으로 이어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디션도 많이 보고, 공연도 해왔어요. 그런데 나이가 나이인 만큼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사는 스타일이라 그 순간이 즐거우면 그만이었고, 그만큼 재밌게 살았어요. 근데 졸업을 딱 하고나니 막상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처음엔 무서운 마음에 1년간 아르바이트만 하며 시간을 버리기도 했죠. 그러다 다시 오디션을 보고 공연도 하게 됐어요. 그렇게 4년 정도 연기를 했는데 하다 보니까 또 다른 고민이 생겼어요. 꿈이 큰 편이라 '크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근데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힘들어 하면서 '진짜 연기가 하고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그 때 '렛미인' 오디션을 보게 됐고, 좋은 기회가 왔어요. 제 꿈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된 거죠."

20대 후반에 거머쥔 기회. 그래서 이은지에게 '렛미인'은 더욱 특별하다. 첫 연기 오디션 당시 느낌이 좋았던 이은지는 이후 진행된 무브먼트 오디션에서 다른 무언가를 추구했다.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편한 옷을 입고 오라고 했지만 그는 이전 오디션에서 입고 갔던 흰색 원피스를 입고 갔다. 자신이 그 때 그 배우라는 것을 각인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자신을 합격시켜준 행운의 옷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다. 실제로 이은지는 이날 인터뷰에도 행운의 옷인 당시 원피스를 입고 왔다.

"저만 원피스를 입었더라고요.(웃음) 그래도 활동하기 편한 원피스라 두시간 동안 열심히 땀 흘리면서 했어요. 진짜 그냥 재밌었어요. 오디션이라는 생각보다 학교에서 수업하는 느낌이었죠. 그 다음 오디션에선 지정 연기를 했는데 지금의 오스카인 오승훈, 안승균 배우와 같이 하게 됐어요. 승훈이는 열정이 장난 아니었어요. 눈이 살아있더라고요. 승균이는 진짜 오스카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신기하게 둘 다 잘 맞더라고요. 편했죠."

운명이었을까. 두 오스카와 합을 맞췄던 이은지는 오승훈, 안승균과 함께 '렛미인' 오디션에 합격했다. 이은지와 함께 박소담까지 일라이 역에 합격하면서 이은지 박소담 오승훈 안승균, 보물 같은 신예 4명이 '렛미인' 무대에 서게 됐다.

"부담감과 책임감이 당연히 있어요. 하지만 과정 자체도 즐거웠고 제가 부담을 갖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행복하게 연습하고 재밌게 할 수 있었어요. 처음 4명이 모여 프로필 촬영을 할 때는 어색했는데 점점 얘기하고 연습하면서 친해졌어요. 넷 다 연습 전엔 오디션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신기해했어요."

박소담과 함께 일라이 역에 캐스팅된 이은지. '충무로 괴물'이라 불리는 박소담에게 쏠린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속상함은 없었을까. 이은지는 "'네가 박소담과 더블이라고?'라는 반응 때문에 더 부담됐다"며 웃었다.

"박소담 배우가 함께 일라이 역을 하게 됐다고 해서 영화 '검은 사제들'을 봤어요. 근데 너무 잘 하는 거예요. 그 때 부담이 확 왔어요.(웃음) 주변에서도 박소담 배우가 워낙 잘 한다는 말을 많이 해주셔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변 반응 때문에 더 부담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연습을 시작하니 부담보다는 정말 행복하고 좋았어요."

본격적인 연습 전부터 이은지는 영화 OST를 들으며 작품 분위기에 녹아들려 노력했다. 이후 리딩부터 런스루까지 단 일주일이 걸렸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 연습에 맞춰 나가기 위해 더 집중했다. "어느 순간 런을 돌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고 밝힌 이은지는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갔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일라이에 대한 분석은 너무 어려웠어요. 계속 고민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400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일라이는 무슨 감정일까. 하칸을 대할 때와 오스카를 대할 때는 또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제일 궁금했던건 항상 외로운데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였어요. 고민할 게 정말 많았죠.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고요."

고민을 거듭하며 이은지는 조금씩 일라이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칸과 살며 어느 순간 다시 외로움을 느낀 일라이가 오스카를 발견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공감하려 했다. 오스카에게 자신과 같은 외로움과 우울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동질감을 느끼고 호기심이 생겼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말을 걸고, 오스카의 순수함과 엉뚱함을 보게 되면서 점점 오스카를 사랑하게 됐으리라.

"사실 처음에 연습할 땐 하칸에게 아예 마음이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출님과 주진모 선생님이 하칸을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히 남아있을 거라고 하셨죠. 그래도 몇십년을 사랑한 사람인데 마음이 완전 떠났을리가 없다고요. 그 조언을 듣고나니 이후에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칸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면서 애증이 느껴졌어요. 완전 싫다기보다 정도 있고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이미 나의 사랑은 식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미 사랑이 식은 오래된 연인들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요?"

확실히 일라이는 감정선이 어려운 인물이었다. 감정적으로 부딪치는 장면도 많았고, 장면마다 순식간에 감정을 바꿔야 했다. 그러나 자칫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라이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애틋한 감정이 생겼다.

"일라이가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그 아이의 사랑 방법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스카와 하칸에게 정말 순수한 사랑으로 다가가는 거예요. 이게 나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긴 하지만 전 이기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더 순수하게 사랑하려는 마음이 보였죠. 사랑하는 사람들을 항상 떠나 보내야 하고 혼자 남겨지는 일라이의 외로운 마음을 더 봐주셨으면 해요."

일라이의 감정과 함께 이를 표현하는 움직임 역시 중요했다. 또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표현법도 신경 써야 했다.

이은지는 "뱀파이어의 특징을 움직임에서 찾았다. 연출님이 알려주시는 것을 토대로 몸짓에 강약을 주려 했다"며 "가벼우면서도 강한 힘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400년 살았으니 버티고 서있는 것 자체에도 무게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심한 부분에 더 신경쓰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물어뜯고 피 먹고 이런 부분들은 연습이 돼있어서 그렇게 힘들진 않아요. 다만 실수할까봐 더 신경 쓰는 부분은 있죠. 어디 가서 뱀파이어 역을 만나겠어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를 표현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이 되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도도 이것 저것 하게 되고요. 물론 숙제도 많고 연구해야할 것도 많아요.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어요."

그렇다면 감정과 무브먼트를 통틀어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은 무엇일까. 이은지는 "오스카를 떠날 때 너무 슬프다"며 "오스카를 두고 가야 한다니.. 가기 싫은데 가야 되니까 너무 슬프다. '넌 여기 있어야돼'라고 하는 장면이 미치도록 슬프다"고 답했다.

이어 오스카 역을 맡은 오승훈과 안승균에 대해 물었다. "(안)승균이는 약간 영화에서처럼 음침한 면이 있는 오스카인 것 같아요. 순수함보다 우울하고 음침한 면이 더 많아 안아주고 싶죠. (오)승훈이는 정말 그냥 아이 같이 순수한 오스카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요. 누나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웃음) 진짜 자기가 열두살인 것처럼 웃는데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어요. 두 배우가 다른 감정으로 안아주고 싶게 하죠."(웃음)

감정과 움직임 모든 것에 집중해야 하는 작품인 만큼 '렛미인'은 이은지에게 연기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연구를 하게 했고, 상대방과 호흡하며 여러가지 시도를 할 수 있게 해줬다. 큰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더 효과적인지 조금씩 알게 해줬다. "공부가 많이 된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렛미인'은 배움 그 자체다.

"'렛미인'을 하면서 정말 평생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요. 사실 연기는 친구 따라 갔다가 우연히 시작하게 됐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배우고 또 무대에 서서 계속 하다 보니까 너무 즐겁고 재밌더라고요. 평생 연기해야겠다는 마음이 항상 제 안에 있어요. 쉼없이 연기를 하고싶어요. 평생 연기할 거니까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연극 '렛미인'. 공연시간 140분. 오는 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02-577-1987

[이은지. 사진 = 곽경훈 기자 kphoto@mydaily.co.kr]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