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노바디’, 순간의 선택이 빚어낸 아홉 개의 인생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순간의 선택이 빚어낸 아홉 개의 인생. 세번의 사랑과 9개의 각기 다른 삶.

니모 노바디(자레드 레토 분)는 1975년 2월 9일 생이다. 2092년 죽음을 눈앞에 둔 118살의 니모 노바디는 세포 재생술로 더 이상 인간이 죽지 않는 이 지구상에서 노화로 죽는 마지막 인간이다. 그는 지금 기억의 혼란으로 “미스터 노바디”라는 이름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자.”이다.

그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의 기억 속뿐이고 그의 기억은 그가 34세였던 2009년에 멈춰있다. 그런 만큼 2009년부터 2092년까지의 기억은 전혀 없다. 118년을 살아온 니모는 그를 치료하는 의사의 최면으로 태어나기 전, 다른 아이들과 천국에 있었던 기억부터 회상하기 시작한다. 니모는 태어날 때 망각의 천사가 입술에 손을 대면 모든 걸 잊게 되는 망각의 표징을 천사의 실수로 받지 못하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단풍잎이 나비의 날개 짓으로 날아올라 니모 아버지 발밑에 떨어지고 그 단풍잎에 미끄러진 니모의 아버지는 나비효과로 인해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니모 엄마와 마주치게 된다. 사랑에 빠져 결혼한 그들을 부모로 선택한 니모는 이윽고 세상에 태어난다.

어느 날, 118세의 니모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찾아온 젊은 기자와 인터뷰를 시작하고 5살 때부터 동네 소꿉 친구였던 안나와 앨리스, 그리고 진을 회상하면서 인생을 바꿔놓았던 첫 번째 선택을 떠올린다.

부모의 이혼으로 9살 된 니모는 부모님 중 누구와 살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한다. 가까스로 니모는 마지막 순간에 떠나는 열차를 향해 뛰기 시작하고 엄마를 태운 기차에 오르면서 첫 번째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을 시작으로 니모는 각기 다른 아홉 가지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상자 안에 갇힌 비둘기의 행동을 통해 조건반사에 관한 심리학적 용어인 “비둘기 미신”을 설명하는 타이틀 신에 이어 시체공시소에 시체로 누워있는 34세의 니모와 물속에 잠긴 자동차 안에서 탈출하려는 니모, 그리고 욕조에서 총을 맞고 죽는 니모의 인서트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2092년, 뉴욕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118세의 니모가 그를 치료하는 박사의 최면으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몽환적인 프롤로그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젊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지는 노인 니모의 진술은 그의 소꿉 친구였던 안나와 엘리스, 진과 각기 결혼하는 장면을 기점으로 니모의 선택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아야했던 그의 아홉가지 삶이 펼쳐진다.

어머니를 선택한 니모는 15세 때, 새아버지의 딸 안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어른들의 반대로 가슴 아픈 이별을 겪게 되고, 아버지를 선택한 또 다른 니모는 앨리스와 진을 만나 가슴 설레이면서도 아픈 첫 사랑을 경험한다.

그리고 어른이 된 34살의 니모는 어린 시절에 헤어졌던 안나를 찾아 헤메는 수영장 관리인, 앨리스와 결혼한 다큐멘터리 진행자, 진과 결혼한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 인생을 살게 된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니모와 안나(다이앤 크루거 분). 니모가 헌신적으로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앨리스(사라 폴리 분). 니모를 사랑하지만 니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진(린당 팜 분), 니모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누구이며 가장 행복했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남녀 관계에서 가능한 모든 사랑의 구조를 통해 세번의 사랑과 9개의 각기 다른 삶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아님 니모의 상상인지 뒤죽박죽인 노인 니모의 진술을 듣는 젊은 기자처럼 관객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그런 만큼 명료하지 않은 118세 니모의 기억만큼 이 영화의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 환상과 실재,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관객들로 하여금 끝까지 반추하게 한다.

그런 만큼 SF와 판타지, 멜로 장르가 뒤섞인 이 영화는 처음엔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지만 9개의 복잡한 니모의 삶은 모든 가능성을 드러내면서 인생과 선택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상상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복잡다난한 니모의 얽힌 9가지 삶을 실타래 풀듯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유려한 편집기술과 감각적인 영상, 귀에 익은 명곡과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의 애잔함은 물론, 탄탄한 연출과 각본, 뛰어난 앙상블 연기에 기인한다.

벨기에 출신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은 1991년, 신생아실의 화재로 이웃집 친구와 부모가 바뀌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한 소년이 나이를 먹을수록 분노에 사로잡혀 결국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장편영화 데뷔작 “토토의 천국”으로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삶과 죽음에 대한 환상을 그려 칸영화제와 세자르영화제에서 수상하였고 1996년, 다운증후군 환자와 성공한 세일즈 강사와의 우정을 다룬 “제8요일”로 큰 인기를 모았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이 14년 만에 내놓은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에만 7년이 걸렸고 감독의 독창적인 상상력과 재치 있는 연출력, 그리고 서로 다른 니모의 아홉 가지 인생을 넘나드는 능수능란한 편집과 “제8요일”에서 익숙했던 장면 구성, 그리고 유려한 촬영이 꿈과 현실을 몽한적으로 접붙인다. 또한 SF소설을 쓰는 니모의 상상 속에서 구현된 환상적인 미래 세계는 물론, 결혼식장에 있는 신부 안나의 얼굴이 이내 엘리스의 웃는 모습으로, 또 진의 얼굴로 이어져 바뀌고, 엘리스의 남편인 니모에게 진과 찍은 가족사진이 배달되는 상황은 현실인지, 꿈 인지, 낯설지만 한번 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느꼈던 아득한 생경감을 준다.

제 6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노미네이트되며 화제가 된 이 영화는 제 20회 스톡홀름국제영화제 최우수 촬영상, 제42회 시체스영화제 오피셜 판타스틱-FX작업상, 제23회 유럽영화상 관객 선정 최우수 유럽영화상 등을 수상하는 등 평단을 사로잡았다. 반복되는 경쾌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 “미스터 샌드맨(Mr.Sandman)”은 물론, 귀에 익은 명곡들의 뛰어난 선곡과 감각적인 OST는 영화의 극적 재미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배가시켜준다.

또한 성공한 사업가에서 평범한 복사기 회사직원, 그리고 노인 역할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 니모 역의 자레드 레토와 세 여인 역으로 분한 “카핑베토벤”의 다이앤 크루거, 연기부터 연출까지 팔색조의 매력을 지닌 사라 폴리와 “인도차이나‘의 린당 팜의 열연은 물론, 15세 니모 역의 토비 레그보와 15세 안나 역의 주노 템플이 금기시된 사랑에 빠져든 10대 커플로 분해 폭발적이면서도 충동적인 사춘기의 열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선택의 중요성이 아니라 어떤 선택이라도 자연스러운 선택이며 어떤 인생도 가치가 있다고 역설한다. 118세의 니모의 회상인 동시에 15세의 니모가 쓴 소설이며 9세의 니모가 펼친 상상이기도 한 이 영화는 “많은 선택의 순간들에 있어서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전제로 그 선택들을 따라가면서 복잡하게 진행된다.

그런 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선택들로 삶은 이루어져 있고 그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의 존재 여부가 결정되는데 어쩌면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예측처럼 “미스터 노바디”는 제목처럼 존재했을 수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결정은 관객의 몫이지만 “만약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이라는 전제는 누구나 한번쯤 해봤던 상상이며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의심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영화의 복잡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쉽게 공감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극 중 다큐멘터리 진행자 니모가 설명 해 주는 물리학이론들은 이 영화를 한층 어렵게 느끼게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9개의 인생을 매끄럽게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각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올바른 것이고, 모든 길이 올바른 길이며, 모든 것은 다른 것을 가질 수 있고, 그 의미보다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 라고 하는 노인 니모의 대사는 삶의 모든 경험들이 가치 있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감독의 철학을 각인시켜준다.

무엇보다 니모와 세 여인과의 각기 다른 사랑이 아련한 슬픔을 부각시켜주는 이 영화의 정점은 니모와 안나와의 절절한 이별과 만남이다. 존재와 선택에 대한 이 영화의 포인트는 “너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다.”라는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으로 귀결된다.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미스터 노바디”는 깊어가는 가을날에 볼만한 두근두근 시네마로 손색이 없다.

“이 영화는 선택에 대한 영화다. 우리가 선택할 때 운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용할까? 우리는 왜 다른 선택이 아니고 그 선택을 했는가? 나는 선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다양성과 복잡성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가 선택을 할 때 결과가 두 가지만 나오지 않는다.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결과는 무한대다. 결과들은 가지를 치듯 펼쳐진다. 나는 관객들이 무한 가지의 경우의 수를 느끼도록 만들고 싶었다. 거기에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아이의 시선과 이 아이의 미래인 노인이 자신의 과거를 보는 시선이 만났으면 했다. 나는 선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다양성과 복잡성,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 자코 반 도마엘 감독

[영화 ‘미스터 노바디’스틸컷. 사진 =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전형진 기자 hjjeon@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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