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태양광 접고 배터리·전장 집중…구광모 취임 뒤 LG전자 매출 61조→89조
AI·바이오·클린테크로 다음 10년 준비…배터리 캐즘 등 과제는 남아
[편집자주] 한국 재계의 세대교체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의선·구광모 회장 등 1970~1980년대생 총수와 전문경영인들이 그룹 전면에 서며 산업 지형도 빠르게 바뀌는 중이다. 이들은 전통 제조업의 체질 개선부터 미래 사업 발굴, 글로벌 확장, 지배구조 재편까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새 시대의 경영’을 실험하고 있다. 마이데일리는 재계의 7080 리더들을 통해 한국 기업의 다음 10년을 이끌 인물과 전략을 짚어본다.
[마이데일리 = 윤진웅·심지원 기자] 구광모 LG 회장을 관통하는 단어는 ‘조용한 재편’이다. 2018년 6월 취임 후 구 회장은 요란한 구호 대신 사업 포트폴리오의 뼈대를 바꾸는 방식으로 체질을 바꿨다. 안 되는 사업은 칼 같이 정리했다. 휴대폰과 태양광 패넌 사업 철수가 단적인 예다. 대신 인공지능(AI)와 전장 등 미래 사업에는 인력과 자본을 확실히 밀어줬다.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내용만 놓고 보면 LG를 가장 크게 바꾼 7년이었다. “하고 싶은 사업이 아닌, 이기는 사업을 한다”는 구광모식 실용주의가 LG의 DNA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체질 개선은 숫자로 입증됐다. 공정거래위원회 자료를 보면 LG그룹 자산총액은 2018년 5월 123조1350억원에서 2026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기준 186조2790억원으로 커졌다. 상장 계열사 합산 시가총액도 2018년 말 82조1656억원에서 2026년 4월 27일 208조7300억원으로 불어났다. 자산과 시총 모두 커졌지만, 특히 시장이 미래가치를 더 높게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구 회장 체제의 변화가 읽힌다.
숫자만 커진 게 아니었다. 돈 버는 방식이 달라졌다. 대표 계열사인 LG전자는 2021년 휴대폰 사업 철수를 공식화했고, 2022년에는 태양광 패널 사업 종료를 결정했다. 대신 전장과 구독, 플랫폼, 공조 등 B2B와 비하드웨어 영역을 키웠다. LG전자는 휴대폰 철수 당시 전기차 부품, IoT, B2B 솔루션 같은 성장 영역에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고, 태양광 사업 종료 때도 미래 성장사업에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쓰겠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결과 구 회장 취임 첫해였던 2018년 61조3000억원이었던 LG전자 연간 매출은 지난해 89조2000억원으로 확대됐다.
◇ 안 되면 포기하라…실패 사업부터 과감하게 정리
구 회장 체제의 특징은 미련 없이 접을 사업을 정리했다는 점이다. LG전자 휴대폰 사업은 수년간 적자가 이어졌고, 2021년 4월 이사회 결의를 통해 결국 철수 수순을 밟았다. 2022년 2월에는 태양광 패널 사업도 종료했다. 두 사업 모두 LG를 대표하던 소비자 접점 사업이었지만, 수익성과 성장성 측면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구 회장 체제는 ‘하고 싶은 사업’보다 ‘되는 사업’에 자본과 인력을 다시 배치하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 상징적인 결단은 배터리 분리였다. LG화학은 2020년 배터리 사업을 물적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출범시켰고, LG에너지솔루션은 2022년 상장했다. 배터리를 그룹 미래의 핵심 축으로 키우기 위해 독립 법인 체제로 올린 것이다. LG는 이후에도 배터리와 AI, 바이오, 모빌리티 분야를 미래 핵심 축으로 거듭 강조했다.
◇ 배터리·전장·B2B…달라진 LG의 돈 버는 방식
구 회장 체제의 변화는 전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읽힌다. LG전자 VS사업본부 매출은 2024년 10조6200억원을 기록했다. 2년 연속 10조원을 넘긴 것이다. 전기차 시장의 일시적 둔화 속에서도 높은 수주잔고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 예전 LG가 TV와 가전 중심 그룹이었다면, 이제는 전장도 확실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가전사업도 새로운 방식으로 굴러갔다. LG전자 HS사업본부는 2024년 매출 33조2000억원, 영업이익 2조400억원을 기록했다. 구독과 직접판매, 프리미엄 제품 확대를 통해 안정적 수익 구조를 만들었다. 2025년에는 VS와 ES, 즉 전장과 냉난방공조를 합친 두 개의 핵심 B2B 축의 영업이익이 처음으로 1조원을 넘겼는데, 이는 B2B가 더 이상 보조축이 아니라 LG전자 실적을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배터리 계열사도 빼놓을 수 없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4년 매출 25조6000억원, 영업이익 5754억원을 기록했다. 전기차 수요 둔화 영향으로 전년보다 매출은 24.1%, 영업이익은 73.4% 줄었지만, 그룹 안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무게를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구 회장의 미래 사업 방향은 여전히 배터리와 전장, B2B 위에 서 있었다.
◇ 구 회장의 다음 수는 ABC
구 회장이 최근 가장 선명하게 밀고 있는 키워드는 ‘ABC’다. AI, 바이오, 클린테크다. 2024년 6월 그는 미국 테네시와 실리콘밸리를 돌며 북미 사업 전략과 미래 준비 상황을 점검했고, AI·바이오·클린테크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직접 챙겼다. 이어 올해 4월에는 다시 실리콘밸리를 찾아 AI 상용화와 피지컬 AI 전략을 점검했다.
외부 혁신 생태계와의 연결도 빨라졌다. LG는 2023년 LG테크놀로지벤처스 운용 펀드를 1조원 규모로 키웠다. 지난 5년간 64개 글로벌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 펀드에 4000억원 이상을 투자했고, 절반가량이 AI·바이오·배터리·모빌리티 분야에 들어갔다. ‘조용한 재편’의 실체는 외부 기술과 내부 사업을 연결하는 구조를 꾸준히 만드는 데 있던 셈이다.
LG NOVA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LG NOVA는 2020년 말 출범한 북미이노베이션센터로, LG전자가 실리콘밸리에서 신사업과 스타트업 협업을 찾는 창구다. 최근에는 AI 중심 벤처 육성 플랫폼으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LG가 단순한 가전 회사가 아니라 기술 생태계를 짜는 회사로 옮겨가고 있다는 상징적 장치다.
◇7080 리더십의 상징이 된 이유
구 회장이 7080 재계 리더십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유는 목소리가 크거나 존재감이 강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드러내지 않고 구조를 바꾸는 방식, 안 되는 사업을 정리하고 될 사업에 자본과 사람을 몰아주는 방식, 그리고 LG를 가전 중심 그룹에서 배터리·전장·AI·클린테크 그룹으로 재정의한 방식이 지금의 구 회장의 리더십을 만들었다. 휴대폰을 접고, 태양광을 정리하고, 배터리를 키우고, 전장을 10조원대 사업으로 키운 과정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자동차 회사를 첨단 테크기업으로 바꿨다면 구 회장은 전통 가전그룹을 미래 산업 포트폴리오 기업으로 바꿨다. 아직 배터리 업황과 수익성, 상속 소송의 후유증 같은 숙제는 남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있다. 구 회장 취임 후 LG를 더 이상 “TV와 냉장고 잘 만드는 회사”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7080 총수 시대를 말할 때 구 회장을 빼놓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배터리 캐즘은 남은 숙제…장자 승계 공방도
성과가 뚜렷한 만큼 남은 숙제도 분명하다. 가장 큰 부담은 배터리 캐즘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4년 실적에서 전년 대비 큰 폭의 이익 감소를 기록했다. 전기차 시장 둔화가 직격탄이었다. LG전자도 2025년 매출은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영업이익은 2조4800억원으로 줄었다. 구 회장이 미래 사업을 키운 만큼, 그 미래 사업이 흔들릴 때 그룹 전체의 수익성 변동성도 커질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LG 특유의 장자 승계 원칙이 법정 공방으로 번진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2023년 불거진 구 회장의 상속 재분할 소송은 '무풍(無風) 경영'을 지향하던 구 회장 체제에 균열을 냈다. 지난 2월 1심 법원이 구 회장 손을 들어주며 일단락되는 분위기지만, 구 회장 체제 역시 상속과 승계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재 ㈜LG 최대주주는 구 회장으로 지분율은 약 15.95~15.96% 수준이다. 오너 일가 및 특수관계인 지분은 약 42%대로 알려져 있다. 고(故) 구본무 회장이 보유했던 ㈜LG 지분 11.28% 가운데 8.76%는 구 회장이 상속받았고, 구연경 대표가 2.01%, 구연수 씨가 0.51%를 각각 나눠 받았다. 김영식 여사는 ㈜LG 지분은 상속받지 않고 금융투자상품과 부동산, 미술품 등 다른 자산을 상속받았다. 잡음은 적지만 지배구조의 불편한 그림자는 여전한 숙제라는 평가다.
윤진웅 기자 , 심지원 기자 woon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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