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제작한 임은정 대표는 시나리오를 처음 마주했을 때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을 떠올렸다. ‘타인의 삶’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국가의 신념에 매몰되어 살아가던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가 극작가 드라이만과 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며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임 대표는 국가를 위해 타인을 감시하고 도청하던 비밀경찰의 고뇌가 단종(박지훈 분)을 지켜보며 심리적 변화를 겪는 엄흥도(유해진 분)의 딜레마와 맞닿아 있다고 보았다.
비즐러는 처음에는 체제 반역의 증거를 찾기 위해 도청을 시작하지만 벽 너머로 들려오는 베토벤의 선율과 그들의 진솔한 대화는 메마른 그의 내면을 적신다. 엄흥도 역시 폐위된 어린 단종을 감시하며 권력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고립된 공간에서 고통받는 단종의 인간적인 면모를 목격하며 점차 동화되어 간다. 두 인물 모두 ‘권력의 대리인’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감시 대상이 적이 아니라 자신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채워줄 고귀한 영혼임을 깨닫는 순간, 감시는 관찰로, 관찰은 깊은 이해로 나아간다.
인간은 타인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때 비로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며 동시에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다. 비즐러는 예술가를 지키기 위해 커리어를 포기하고 우편배달부가 되는 길을 택했고, 엄흥도는 장례 금지령이라는 엄명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단종의 마지막을 지켰다. 두 사람은 타인의 삶을 통해 발견한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벽을 허무는 과정이며 그 빈자리에 타인이 가진 빛을 채워 넣는 일이다.
임 대표 또한 비즐러와 엄흥도가 그러했듯, 장항준 감독을 진심 어린 시선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세상이 그에게 붙여 놓은 '가벼운 예능인'이라는 이름표 너머에서 임 대표는 따뜻한 감성과 이야기를 향한 깊은 애정을 발견했다. 대중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쌓아 온 각본가로서의 결을 알아본 것이다. 그 관찰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믿는 일이었고 그 믿음은 결국 두 사람 모두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관찰은 타인을 발견하는 일인 동시에 내 삶을 변화시키는 조용하고도 강력한 힘이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가.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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