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박찬구 회장이 증명한 합성고무 ‘스페셜티’ 전략
중국 공급 과잉 속 실적 하락세…바이오 사업 집중
[편집자주] 1972년 갓 오일쇼크를 넘긴 대한민국이 ‘수출 보국’의 가치 아래 울산에 세웠던 55년 차 나프타분해시설(NCC) 공장이 거대한 고철 덩어리로 변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최신 공법으로 설계된 파이프라인은 녹이 슬었고, 석화 산업의 중심지에는 적막함만이 가득하다. 밤낮없이 돌아가 한국 수출의 20%를 책임지며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우리 석유화학 산업이 처한 현주소다.
중국의 공세와 글로벌 환경 규제라는 거대한 파고 속에서 ‘종말’에 가까운 구조적 침체에 직면한 석화업계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업황 반등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들은 대규모 인력 감축과 가동 중단 등을 통한 구조조정은 물론 고부가 전환이라는 숙제를 풀며 ‘생존 투쟁’에 돌입했다. 2026년 대한민국 석화 산업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국내 석유화학 ‘빅4’인 금호석화학이 석유화학 기업들 중 유일하게 흑자를 내며 웃음을 짓고 있다. 금호석유화학의 운명을 갈랐던 선택과 향후 전략을 살펴보며 석유화학 산업 전환의 시험대를 조명한다.
[마이데일리 = 심지원 기자] 50년 넘게 ‘고무 외길’을 걸으며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한 축을 맡아온 금호석유화학이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합성고무로 세계 정상에 오른 금호석유화학은 범용 석유제품 제품 공급 과잉이라는 업계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친환경·신소재 중심의 ‘첨단 소재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복안이다.
금호석유화학의 뿌리는 1970년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와 일본 미쓰이물산의 합작으로 설립된 ‘한국합성고무공업’이 그 출발점이다. 당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합성고무를 국산화하겠다는 목표 아래 설립된 이 회사는 1973년 울산에 국내 최초의 합성고무 공장을 준공하며 합성고무 국산화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이후 1976년 설립된 금호화학은 1985년 한국합성고무공업과의 합병을 통해 현재의 ‘금호석유화학’으로 재탄생했다.
◇ 박찬구 회장의 결단, 범용 대신 합성고무 중점
금호석유화학은 범용 제품보단 다른 제품들에 주력해온 것이 특징이다. 특히 NB라텍스(위생장갑 원료)를 필두로 연구개발을 진행한 결과 글로벌 1위 생산기업으로 우뚝 섰다.
이 같은 성과는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의 이른바 ‘고부가가치(스페셜티) 집념’과 ‘내실 경영’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회장은 2015년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완전히 분리되며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한 이후 외형 확장보다는 철저하게 수익성 중심의 포트폴리오 재편에 집중해 왔다.
박 회장은 과거 그룹이 무리한 인수합병(M&A)으로 흔들릴 때도 “본업인 화학의 본원적 경쟁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합성고무 기술 고도화에 매진했다.
박 회장의 통찰력이 가장 빛난 대목은 단연 NB라텍스다. 2000년대 초반 국내외 석유화학사들이 대규모 장치 산업의 이점을 살린 범용 플라스틱 생산 확대에만 매몰돼 있을 때 그는 현장 경영을 통해 의료용·조리용 장갑의 핵심 원료인 NB라텍스의 잠재력에 주목,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러한 박 회장의 뚝심은 10년 뒤 예기치 못한 글로벌 팬데믹 국면에서 빛을 발했다. 2021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위생용품 수요가 폭발하자 선제적으로 구축해둔 세계 최대 규모의 NB라텍스 생산 라인은 금호석유화학에 ‘사상 최대 실적’이라는 결실을 안겼다.
실제 금호석유화학의 2021년엔 매출 8조4618억원, 영업이익 2조4068억원을 거뒀다. 전년 대비 매출은 75.9%, 영업이익은 무려 224.3% 급증하며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 석유화학 업황 부진 속 ‘나홀로 흑자’
다만 최근 지표는 점차 하락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의 2024년 매출은 7조1550억원으로 전년 대비 13% 늘며 외형 성장을 이뤘지만, 영업이익은 2728억원에 그치며 24% 급감했다. 2022년 이후 3년 연속 영업이익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수익성의 척도인 영업이익률은 3.8%까지 떨어졌으며 지난해 3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도 전년 동기 대비 0.4% 감소한 5조3254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2.8% 증가한 2703억원으로 집계됐다.
뼈아픈 수익성 악화에도 불구하고 금호석화가 웃을 수 있는 건 ‘재무 체력’ 덕분이다. 이익이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도 현금성 자산을 전년(4293억원) 대비 74% 증가한 7463억원까지 끌어올리며, 미래를 위한 탄소나노튜브(CNT) 증설 실탄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재무 구조 역시 안정적이다. 같은 기간 부채비율은 35.2%로 전년 말(38%) 대비 약 3%포인트 낮아졌다. 고금리와 실적 부진으로 경쟁사들이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가운데 금호석유화학은 비교적 자유롭게 신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는 평가다.
반면 중국 의존도가 높은 사업 부문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했다. 중국산 저가 제품 공급 과잉과 내수 경기 침체 영향으로 합성수지 부문 지난해 3분기 누계 판매량은 43만4540톤으로 전년 대비 약 6% 감소했다. 누계 매출액 역시 판매 단가 유지에도 불구하고 판매량 감소로 전년 대비 3.8% 줄어든 9068억원에 그쳤다.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CNT가 포함된 기타 부문의 하락 폭은 더 컸다. 같은 기간 누계 매출은 4166억원으로 전년 대비 9% 이상 감소하며,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에 따른 배터리 소재 수요 위축이 실적으로 확인됐다.
◇ 미래 성장 키워드는 ‘친환경’…바이오 사업 주력
금호석유화학은 올해 핵심 과제로 ‘친환경·바이오·고부가’를 제시했다. 박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고부가 스페셜티 부문에서는 연구개발(R&D) 역량을 강화해 차별화된 기술 기반 선도 제품을 개발하고,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갖춘 신소재 포트폴리오를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늘의 스페셜티가 내일의 범용이 된다”는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CNT와 친환경 바이오 소재를 직접 지목했다. 이는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자신이 일궈온 회사를 ‘첨단 소재 기업’으로 진화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현재 금호석유화학은 전기차용 고기능성 합성고무(SSBR)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사탕수수 기반 바이오 원료에 고기능화 기술을 접목한 친환경 합성고무 파일럿 제조 기술도 확보했다.
아울러 글로벌 환경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탈솔벤트(DEVO) 공정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해당 공정은 에너지 소비와 이산화탄소 배출을 동시에 줄일 수 있는 기술로, 향후 상업화 및 실제 공정 적용을 목표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액화천연가스(LNG) 슈퍼사이클 역시 실적 개선을 뒷받침할 변수로 꼽힌다. 금호석유화학그룹 자회사인 금호미쓰이화학은 글로벌 LNG 수출 확대 흐름에 맞춰 메틸렌 디페닐 디이소시아네이트(MDI)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 MDI는 LNG 운반선 보냉재에 사용되는 단열재의 핵심 원료다.
이에 따라 금호미쓰이화학은 지난해 12월 주주총회를 거쳐 1400억원을 투자해 MDI 생산능력을 10만톤 증설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연간 61만톤이던 생산능력은 71만톤으로 확대되며, 내달 본 공사에 착수해 연말부터 증설 물량에 대한 상업 생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상준 서울과기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석유화학 산업은 단번에 판도를 바꿀 완전한 ‘게임체인저’가 드문 만큼 다양한 분야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며 “금호석유화학은 스페셜티 경쟁력이 탄탄한 기업으로, 친환경 중심의 투자 전략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심지원 기자 sim@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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