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부드러운 혁명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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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김지우 기자]

서양 미술사 600년을 대표하는 65점의 명작을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마이데일리가 독자들의 관람에 깊이를 더할 작품 도슨트를 엄선해 선보입니다.


▲ 마리 로랑생 <나나>

마리 로랑생, <나나>, 캔버스에 유채, 1927년, 42.28 cm x 33.66 cm, 샌디에이고 미술관 © The San Diego Museum of Art

어두운 모자를 쓴 창백한 소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마리 로랑생은 피카소와도 친구였고 아방가르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는 연인이었고 당시 파리 아방가르드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로랑생은 누군가의 연인이나 뮤즈로만 기억되길 거부했습니다.

1883년 파리에서 태어난 로랑생은 사생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평생 말하지 않았죠. 이런 출생의 비밀은 로랑생의 예술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그린 인물들은 항상 어딘가 모호하고, 현실과 꿈의 경계에 떠 있는 듯합니다.

1927년 그려진 이 <나나>를 보세요.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채, 흐릿한 윤곽선, 몽환적인 분위기. 로랑생은 입체파나 야수파의 강렬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로랑생은 의도적으로 부드러움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로랑생의 부드러움은 약점이 아니라 또 다른 혁명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 작품을 완성하던 시기 로랑생은 44세였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망명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 지 몇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전쟁의 상처, 사랑의 상실, 그리고 귀향. 이 모든 경험이 그녀의 팔레트를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로랑생이 즐겨 사용한 회색, 분홍색, 연한 파란색. 이 색들은 '코케트(coquette)'라 불리는 파리 여성들의 우아함을 표현합니다. 코케트는 당시 매력적이고 세련되며 독립적인 현대 여성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랑생의 코케트들은 어딘가 슬픈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나나의 큰 눈은 관람객을 똑바로 바라보지만, 그 시선은 텅 비어 있는 듯합니다. <나나> 같은 작품들은 1920-30년대 파리의 패션과 감수성을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더 이상 남성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여성적 주체성의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어떤 '주의'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성, 소녀, 그리고 동물들이 함께하는 파스텔빛 유토피아를 창조합니다.

이 그림 속 나나는 누구일까요? 실존 인물일 수도, 로랑생의 상상 속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소녀가 20세기 초, 해방적이면서도 몽환적인 현대 여성의 초상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Modern Revolution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보셨습니다. 혁명은 항상 시끄럽고 격렬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렇게 조용하고 은밀하게, 부드러움의 힘으로도 진행됩니다.


▲ 도슨트 소개

이소영 작가

이소영 작가는 미술 교육인이자 미술 에세이스트입니다. 조이뮤지엄·빅피쉬 아트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하루 한장 인생그림', '처음 만나는 아트컬렉팅' 등 책을 썼습니다.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은 오는 2월 22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김지우 기자 zwm@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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