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공단, 533억원 담배소송 2심도 패소…정기석 이사장 "과학·법 괴리 너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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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폐암, 역학적 상관관계만으로 개인별 인과관계 개연성 추정할 수 없어"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민건강보험공단의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기일을 마친 뒤 나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마이데일리 = 이호빈 기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흡연으로 인해 발생한 재정 손실을 배상하라며 국내외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서울고법 민사6-1부는 15일 건보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533억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동일하게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공단이 소송을 제기한 지 12년 만에 나온 두 번째 법원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건보공단이 흡연으로 인해 지급한 보험급여를 담배회사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공단의 진료비 지출은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예정된 급여 지급 의무의 이행에 해당하며, 담배회사의 위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담배회사와 공단의 재정 손실 사이에 법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공단은 주위적 청구로 담배회사의 제조·판매 행위가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예비적 청구로는 흡연 피해자인 환자들에게 지급한 치료비를 근거로 환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예비적 청구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자 개인별로 흡연과 질병 발생 사이의 구체적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는 한 공단이 이를 대신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취지다.

특히 쟁점이 된 흡연과 폐암 발병의 인과관계에 대해 재판부는 기존 대법원 판례를 다시 한번 명확히 했다. 개인이 흡연을 했고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양자 사이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는 없으며 흡연 시기와 기간, 질병 발병 시점, 건강 상태, 생활습관, 가족력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공단이 제시한 역학적 연구 결과 역시 특정 개인의 질병 원인을 단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공단이 담배회사는 니코틴 의존성을 유발하지 않는 수준으로 제품을 제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 부분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흡연자마다 니코틴 흡입량과 흡연 방식이 달라 의존성이 발생하지 않는 기준을 객관적으로 설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또 이 사건 환자들이 흡연을 시작한 1960~1970년대 당시 담뱃갑 경고 문구가 미흡해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은 오래전부터 사회적으로 경고돼 왔다며 배척했다.

앞서 건보공단은 2014년 4월, 30년·20갑년 이상 흡연한 뒤 폐암이나 후두암을 진단받은 환자 3465명에게 지급한 진료비를 근거로 총 533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공단은 흡연의 중독성과 질병 유발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확립된 만큼, 흡연으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손실에 대해서도 담배회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를 펴왔다. 그러나 2020년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결 직후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정 이사장은 “법원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과학과 법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며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을 넘어선 진리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담배회사들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동안 그로 인한 피해는 국민과 공적 보험이 떠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이사장은 흡연으로 인해 공단이 연간 4조원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며 이는 건강보험 재정과 직결된 문제라고 강조했다. 담배를 피운 직후 질병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20~30년에 걸친 장기적 결과를 봐야 한다며 흡연 피해에 대한 국가의 보호 책임을 거듭 언급했다. 담배회사를 교통사고를 내고 도주한 운전자에 비유하며 “오늘의 판결은 아쉽지만 진리는 언젠가 인정될 것”이라고도 했다.

공단은 대법원 상고 방침을 분명히 했다. 정 이사장은 의료계와 법조계, 보건의료 전문가들과 함께 상고 이유를 정교하게 구성해 법원을 설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항소심에서도 공단 패소로 결론 났지만, 흡연과 질병의 법적 책임 범위를 둘러싼 논쟁은 대법원 판단으로 다시 이어질 전망이다.

이호빈 기자 hblee@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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