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바이오
글로벌 빅파마, 후보물질 경쟁 → 전달 플랫폼 확보 경쟁
에이비엘바이오 등 국내 기업, 기술 수출 등 기술력 입증
[마이데일리 = 이호빈 기자] 글로벌 제약사들이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 실패를 계기로 ‘신약 경쟁’에서 ‘전달 기술 경쟁’으로 전략 축을 옮기고 있다. 실패 이유가 약물이 혈액뇌장벽(BBB)에 가로막혀 뇌로 유입되는 것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4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빅파마를 중심으로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의 성패가 후보물질의 효능보다 약물 전달 기술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바로 핵심은 혈액뇌장벽(BBB, Blood-Brain Barrier)이다. BBB는 외부 독소나 병원체가 뇌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 생체 방어막으로, 뇌혈관 내피세포가 밀집 결합해 형성된 구조다. 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대부분의 약물이 뇌로 유입되는 것 역시 차단하는 물리적 장벽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개별 후보물질 위주의 개발 전략에서 벗어나, BBB 전달 플랫폼 확보에 나서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알츠하이머는 신약 개발 역사상 가장 많은 연구개발비가 투입된 분야 중 하나로 꼽힌다. 아이큐비아(IQVIA)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치료제 임상시험의 실패율은 99%에 달하며, 최근 10년간 주요 임상 프로그램 200개 이상이 중단되거나 후기 임상에서 실패했다.
치료제 개발 비용 역시 평균 56억달러(약 7조4000억원)로 일반 신약이나 항암제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다.
최근에도 실패 사례는 이어졌다. 카사바사이언스는 ‘시무필람’ 임상 3상 실패로 개발을 중단했고, 알렉터 테라퓨틱스도 주요 파이프라인을 정리했다. 화이자, 머크, 로슈 등 글로벌 제약사들도 임상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비만치료제 '위고비'의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를 알츠하이머 적응증으로 확장하려던 노보 노디스크 역시 임상에서 1차 평가지표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뇨·비만 영역에서 성공한 약물도 뇌질환에서는 동일한 효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시 확인됐다는 평가다.
업계는 이 같은 실패의 공통 원인으로 BBB를 지목한다. 항체 등 고분자 치료제의 뇌 도달률은 0.1% 미만이며, 저분자 화합물 역시 대부분 BBB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제약사들은 후보물질 중심 개발에서 벗어나 BBB 전달 플랫폼 확보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플랫폼을 확보하면 후보 교체가 가능해 실패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고, 항체·RNA(리보핵산)·유전자 치료제 등 다양한 모달리티로 확장도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국내 기업도 주목받고 있다. 에이비엘바이오가 개발한 ‘그랩바디-B(Grabody-B)’ 플랫폼은 BBB 수용체인 IGF1R(인슐린유사성장인자 수용체)에 결합하는 이중항체 기반 전달 기술이다.
이 플랫폼은 뇌혈관 내피세포의 수용체 매개 전달 기전을 활용해, 한쪽은 IGF1R에 결합해 BBB 통과를 유도하고 다른 쪽은 질환 표적 단백질에 결합하는 구조다.
쉽게 말해, 항체 치료제가 뇌혈관 내피세포에 ‘필수 물질’로 인식되도록 설계해 BBB를 통과시켜 뇌 안까지 전달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술이다.
비임상 연구에서는 영장류 실험에서 기존 단일항체 대비 뇌 침투량과 약물 노출도가 증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에이비엘바이오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플랫폼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중추신경계 질환 분야의 미충족 의료 수요에 적합한 기술”이라며 “RNA 치료제 역시 간 외 조직으로 전달이 쉽지 않은데, 그랩바디-B는 전달 장벽을 구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제약사와의 계약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달 일라이 릴리와 계약금 4000만달러(약 588억원)를 포함해 총 26억200만달러(약 3조8000억원) 규모의 그랩바디-B 플랫폼을 적용한 기술이전 및 공동 연구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올해 4월에는 GSK와 그랩바디B 플랫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 총 21억4000만파운드(약 4조1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선급금은 3850만파운드(약 700억원) 수준이며, 개발·허가·상업화 단계에 따라 추가 마일스톤을 받는 구조다.
에이비엘바이오 관계자는 “사노피·릴리·GSK 등 글로벌 최상위 제약사와 연이어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는 점에서 글로벌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며 “이들 기업과 본 계약을 맺는 바이오 기업은 극소수”라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이들 계약을 두고 “글로벌 제약사들이 전통적인 단일 파이프라인의 성과에 베팅하는 기존 라이선싱과 달리, BBB 플랫폼이라는 ‘전달 인프라’에 대한 선점 경쟁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국내 기업은 자체 치료제 개발도 병행하고 있다. 아리바이오는 ‘AR1001’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며, 디앤디파마텍은 저분자 치료제 ‘NLY02’를 개발하고 있다. 오스코텍도 타우 단백질 표적 항체 치료제를 연구 중이다.
현재까지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에자이와 바이오젠의 ‘레켐비’와 일라이 릴리의 ‘키순라’ 두 가지다.
다만 이들 약물은 알츠하이머를 완치하는 치료제가 아니라,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 ‘질병 진행 억제제’로 분류된다. BBB 전달 기술이 차세대 알츠하이머 치료제 경쟁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배경이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 실패는 전달 기술의 중요성을 다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앞으로 경쟁력은 약물 자체의 성능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뇌에 도달시키느냐에서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빈 기자 hblee@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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