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지난 8일 일본 여자 프로 골프 ‘요넥스 레이디스’에서 20세 타카노 아이히(高野愛姫) 선수가 우승했다. 대한민국 이민영 선수가 2위.
프로 2년 차 첫 우승이 큰 화제. 그러나 느닷없이 일본인들의 관심을 모은 것은 타카노가 한국인이라는 것. 물론 어떤 증거도 없다. 추정일 뿐. 당장에 일본 매체들도 “근거 없음”이라는 결론.
재일동포 가운데 뛰어난 운동선수들이 많다. 야구의 장훈, 김정일 등이 남긴 기록은 앞으로 영원히 깨어지기 힘든 것으로 꼽힌다. 지금도 프로 야구·축구에는 재일동포 감독·코치들이 여럿 활약하고 있다. 선수도 상당수일 것으로 짐작. 그래서 뛰어난 프로선수들이 “한국인” 소문에 휩싸이는 경우가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한국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정확한 확인은 어렵다. 여러 가지 생활에서의 불이익과 불편 탓에 귀화 재일동포가 많아지면서 한국인 구별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추세. 본인이 밝히지 않는데 굳이 따져 묻는 분위기도 아니다.
타카노가 한국인이라는 소문의 배경은 세 가지. 첫째 특이한 이름. 일본인들은 “희(姫)”자를 여성 이름에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라 했다. 한국인의 이름이라는 의미. 둘째는 얼굴 생김새와 경기 모습. 한국인처럼 생겼으며 스윙 등이 한국 선수와 많이 닮았다 했다. 셋째 타카노골프 스승이 일본 골프 진출 2세대 선수 김애숙(62) 씨라는 것.
모두 그럴싸한 추정으로 보이나 본인이나 가족이 정체성을 밝히기 전까지는 누구도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인일 개연성을 충분히 있어 보인다.
■ 김애숙은 신지애‧강수연·정재은·김하늘·배희경·안선주의 조력자
김애숙 씨는 타카노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가르쳤다. 어머니 에이히(英姬·48) 씨는 “딸을 꼭 봐주셨으면 해서 사무실에 전화했다. 당시 ‘청소년은 안 본다’고 하셨다. 하지만 ‘한 번만이라도’라고 부탁드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왜 어머니는 하필 한국인 김 씨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유능한 일본인 골프 선생이 수두룩할 터인데. 어머니 이름이 공교롭게 한국 발음으로 ‘영희.’ 한국 여성을 상징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 1948년 국정교과서에서 만들어진 “철수와 영희”는 오랫동안 한국 어린이의 대명사. 정겨운 추억의 이름이다.
일본인들도 말하듯 ‘희’는 일본에서 거의 드문 이름자. 모녀가 자매처럼 ‘애희’와 ‘영희,’ ‘희’란 돌림자를 가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길래 한국인 코치에게 도움을 청하고, 6년 이상 스승-제자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란 연상까지 갔다. 하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일 가능성도 크다.
어머니는 “아이가 참을성이 많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딸의 우승을 기뻐했다. 그녀는 골프 경험이 없다. 그러나 유치원 때 골프를 시작한 딸의 스윙을 계속 지켜본 덕분에 “스윙 타이밍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딸은 유치원 때, 남자 선수 이시카와 료의 활약을 본 어머니의 영향으로 골프를 시작했다.
타카노 모녀와 김애숙 씨가 ‘한국인’ 소문에 대해 어떤 설명을 했다는 보도는 없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인 또는 한국계임을 감추어야 하는 재일동포의 고달픈 삶을 생각하면 애써 “한국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설사 그들이 국적을 감춘다고 해도 한국인의 긍지·자부심이 어디로 가겠는가? 재일동포들의 모국 사랑은 여기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도 깊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일본 골프계에서 큰 활약을 하는 김애숙 씨를 일본 매체가 다시 언급한 것은 반가운 일. 매체들은 최근 프로여자 골프와 관련, 재일동포 골퍼 김주헌(61) 씨 근황을 다루기도 했다. 김 씨는 같은 재일동포 김기섭(86) 씨와 함께 아시아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한국 골프에 큰 공헌을 했다.
1985년부터 일본 프로에서 뛴 김애숙 씨는 1998년 일본 진출 13년 만에 첫 우승을 했다. 그러나 부상 등으로 은퇴했다. 신지애의 일본 진출과 함께 선수 돕는 사업을 시작했다. 강수연· 정재은·김하늘·배희경·안선주 등 많은 선수들이 그녀의 회사 소속이었다.
김 씨는 수년 전부터 한국 여자골프의 추락을 걱정해 왔다. 냉정하고도 정확하게 한국 골프의 현실을 진단했다. 상금 규모가 커지는 등 골프 환경은 좋아졌으나 협회 운영 체계는 나아지지 않는다. 선수들의 도전의식 등 정신 자세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 선수 등 한국 골프계의 간절함이 많이 모자란다고 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충고다.
김 씨는 각종 개혁 조치를 서두른 일본 여자골프가 크게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녀의 예상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일본에서 한국 선수 우승은 드물다. 미국에서 일본 선수 성적은 한국 선수를 뛰어넘고 있다.
■ ‘타카노 한국인 소문’으로 다시 기억해야 할 김주현과 김기섭
김주헌 씨는 최근 일본 골프의 전설이며 자신의 스승인 오자키 마사시(尾崎将司)가 운영하는 ‘골프 아카데미 선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화제가 되었다. 94승 오자키의 아카데미가 유명해진 것은 올해 미국 LPGA 셰브런 챔피언십 등 통산 7승의 사이고 마오(西郷真央)와 5승의 하라 에리카(原英莉花) 등을 배출했기 때문.
김 씨는 1982년 제1회 매경오픈 겸 아시아골프 서킷서 프로들을 제치고 아마추어로 우승했다. 아시아 서킷 사상 아마가 프로를 뛰어넘은 것은 15년 만에 3번째였다.
그는 일본협회가 귀화를 종용하며 대표선수로 뛰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뒤 한국 대표로 아시아 경기대회에 출전했다. 1982 뉴델리 대회에서 같은 재일동포 김기섭과 함께 단체 은메달을 땄다.
이어 일본 프로에서 6승을 거뒀다. 2011년 부터는 시니어 대회에 뛰면서 와세다대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19년부터는 대학교수로 활동 중. 일본대 동문인 아들 김헌양도 프로골퍼.
김주헌 씨와 뉴델리에서 은메달을 합작한 김기섭 씨는 1986년 서울 아시안 경기에 다시 나가 단체 금메달을 땄다. 자신은 개인 은메달.
당시 김 씨는 47세 선수. 그러면서 한국 젊은 선수들을 가르쳤다. 일본 아마추어 선수권자였던 그는 “‘괜찮아요’라며 뺀질거리는 젊은 선수에게 ‘나라 대표로 가는 것이니 그런 것은 절대로 안 된다’며 태도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만큼 김 씨가 한국 골프에 끼친 영향이 컸다.
일본 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 1982년 우승자인 그는 1996년 ‘시니어’ 대회, 70세가 되던 2009년 ‘그랜드 시니어’에서도 각각 우승했다. 건축사업을 하며 일본에서 열린 동해오픈 실행위원장을 맡았었다.
김기섭·김주헌. 그들은 지금 한국에서는 거의 잊혔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국 골프계가 영원히 기려야 할 인물들이다.
손태규 칼럼니스트
손태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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