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우리 부부가 해외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일이다. 요즘처럼 무엇이든 검색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아직 없던 시절이다. 싱가포르로 들어가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방콕, 시엠립, 홍콩을 돌아보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사흘간 싱가포르 투어를 마친 다음에 쿠알라룸푸르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동 수단은 야간열차. 싱가포르역에서 쿠알라룸푸르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잠깐 내려서 말레이시아 입국 절차를 밟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오래전 일이고, 해외여행 초기에는 성능이 좋지 않은 미니 디카를 들고 다녔던 터라, 기억력과 사진이 다 신통찮아 아쉽다.
아무튼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다음 날 아침에 쿠알라룸푸르 중앙역에 내렸는데, 남편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허리에 담이 붙어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하게 된 것이다.
잠자리를 몹시 가리는 남편은 어지간한 호텔 방도 불편해하곤 한다. 그런 사람이 덜컹거리는 열차에서 편하게 잠을 잤을 리가 없다. 밤새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지독한 담이 붙고 만 것이다. 침대 열차라 다리 뻗고 잘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희희낙락한 나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꼼짝하기도 힘들다는 사람을 어찌어찌 부축하여 택시를 타고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고, 겨우 체크인한 다음 방으로 갔는데….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남편은 안색이 창백해져 식은땀을 흘렸다. 어지간히 아파서는 내색을 안 하는 통에 본체는 곰이 아닐까 의심하곤 했던 사람인데,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에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니 덜컥 겁이 났다.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나에게, 남편이 겨우 몇 마디 말을 쥐어짜 부탁했다.
“미안한데, 약국에 가서 담 붙은 데 듣는 약 좀 사다 줘.”
그 말을 들은 내가 눈만 끔벅거리고 서 있자, 남편은 심부름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내가 도저히 약 사러 갈 수 없어서 그래.” 하며, 다시 담 붙은 데 듣는 약 좀 사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약을 사러 가는 것이 귀찮아서 뻗댄 게 절대 아니었다. “아니, 귀찮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허리에 담 붙었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그래.”
내 말을 들은 남편은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는지 잠깐 웃더니, 가이드북을 꺼내 보라고 했다. 그때는 가이드북이 여행의 필수품이라, 여행 가방에 가이드북부터 챙겨 넣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나도 도시별로 필요한 가이드북을 챙겨갔으므로, 그것들을 다 꺼내 놓고 ‘여행 회화’편에 “허리에 담이 붙었어요.”라는 문장이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약국이 어디 있나요?”, 혹은 “병원은 어떻게 가나요?” 등의 문장만 있을 뿐, 담 붙었다는 표현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허리에 담이 붙었어요.”를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담 붙었다는 표현이 영어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알 수 없으니 그냥 허리가 아프다고 하자. 지금 허리 쪽이 무지 아프거든. 그런데 허리가 아픈 걸 영어로 뭐라고 하지?”
“두통은 headache라고 하고, 치통은 toothache라고 하는 건 알겠는데, 허리가 아픈 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어쩌구에이크라고 할 것 같은데.”
“어쩌구에이크? backache가 요통인가?”
“backache? 그것도 아픈 거 맞지? 그러면 그냥 그걸로 하자. 약사한테 ‘I have a backache.’ 하면서 ache를 강하게 발음하면, 어디가 아프다는 뜻인 줄 눈치채지 않겠어?” 하며, 허리 아프다는 문장을 영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내가 아픈 게 아니잖아.
“아니지, 내가 아픈 게 아니니까 ‘My husband have a backache.’라고 해야 맞는 거 아냐?” 하는 내 말에, 남편은 그 대책 없이 심각한 상황 중에도 “my husband는 3인칭이니까 have가 아니라 has라고 해야 맞지 않나?” 하며 문법 오류를 정정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My husband has a backache.’라고 정리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인칭까지 고려한 완벽한(?) 영어 문장을 완성한 나는 약국을 찾아가는 동안 잊지 않으려고 계속 중얼거리며 걸었고, 부디 약사 앞에서 발음이 꼬이는 일이 없기를, 약사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그러나 약국에 들어가 보니 호랑이표 파스가 크기별로 진열되어 있어 굳이 되도않는 영어를 더듬거릴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도 값을 묻는 말은 내가 자신 있게 영어로 말할 수 있었다.
“하우 머치 이즈 잇?”
그런 일이, 웃기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웃긴 일이 20년 전에 있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영어에 관한 한 벙어리나 진배없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여행작가 신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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