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김창열 화백의 침묵에 담긴 치열한 삶의 풍경[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아들은 침묵에 휩싸인 아버지의 삶을 어떻게 영화로 만드는가. 그러한 삶은 어떻게 영화가 되어 침묵에서 빠져나오게 되는가. 이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이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에 담겨있다. 김오안 감독(브리지트 부이요 공동감독)이 ‘물방울 화가’인 아버지 김창열(1929~2021) 화백의 마지막 6년간의 삶을 그린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고 세계적 화가로 우뚝 선 거장이 품고 있던 삶의 비밀을 나지막이 들려준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두 감독 외에 한 명의 감독이 더 있다. 바로 김창열 화백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무엇이었으면 좋겠냐고 묻고, 고스란히 영화에 담았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영화의 처음을 열고 끝을 닫으면서 침묵으로 봉인했던 자신의 삶을 아들을 통해 해제한다. 이 영화가 없었다면 아들은 끝내 아버지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를 존경하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첫 장면을 묻는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아기, 전부 하얗게, 한 남자가 상자를 들고 와. 상자 안에는 비밀이 있지”라고 답한다. 김오안 감독은 상자 안에 갇혀 있던 아버지의 비밀을 겨우겨우 이해한다. 김창열 화백은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월남해 서울대를 다니던 도중 한국전쟁을 맞는다. 폭탄이 터져 앞에 있는 남자가 박살이 났고, 탱크 바퀴에 해골이 깔렸다. 중학교 동창 반 이상이 죽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그를 평생 짓눌렀다.

한국을 떠난 뉴욕에 머무르던 시기, 당대 유행이었던 팝아트에 실망한 그는 프랑스 파리의 남쪽 팔레조의 마구간에서 물방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1972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순진한, 기쁜, 슬픈, 얼룩진, 불타는, 확장되는 등 수많은 의미를 지닌 물방울을 그렸다. 그에게 물방울은 무엇인가. 단 하나로 단정할 수 없지만, 그것은 생명일 것이다. 그는 모든 악과 불안, 전쟁의 외상을 지울 수 있는 원초적 생명의 흔적을 남겼다.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스핑크스였다”라는 아버지의 삶의 비밀은 하나둘씩 실체를 드러낸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화백은 “수영”이라고 답한다. 어린 시절, 고향의 강에서 힘들게 배웠던 수영은 물과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었다. 수평선 끝까지 가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훗날 수만 개의 물방울로 잉태됐다. 그는 물속에서 평온했고, 물방울을 그리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지막 장면은 고향 맹산이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화가의 꿈을 키운 공간과의 영원한 이별은 그를 깊은 침묵 속으로 데려갔다. 한국전쟁 이후 더 이상 순수해질 수 없었던 화백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이 영화 이후에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은 다시 태어난다. 역사의 아픔을 오로지 침묵으로 인내한 거장의 물방울이 당신을 기다린다.

[사진 =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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