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하루키의 남자가 체호프를 만났을 때[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누가 봐도 아름다운 배우 겸 연출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드라마 작가 오토(기리시마 레이카) 부부. 아내가 젊은 배우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와 자신의 집에서 외도하는 모습을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청되어 연극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만난다. 말없이 묵묵히 가후쿠의 빨간색 사브 900을 운전하는 미사키와 오래된 습관인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를 연습하는 가후쿠.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눈 덮인 홋카이도에서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본다.(아래 내용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자에게 버림받은 남자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남자가 체호프의 연극으로 상실을 극복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하루키의 남자’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의 특성을 말한다. 이 영화는 2014년 출간된 하루키의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이 소설집엔 총 7편의 단편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남자는 모두 여자가 죽음을 맞이하든, 바람을 피우든 떠나간 이후에 홀로 남겨진다. 남자는 여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깊이 파고드는데, 끝내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하루키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자에게 버림받고 만 남자들, 또는 버림받으려고 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그것은 상처 입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로 선택한 행동으로 인해 결국에는 남자들이 더욱 깊이 상처 입는다는 패턴”이라고 분석한다.

‘셰에라자드’와 ‘기노’의 이야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드라이브 마이 카’를 기반으로 다른 단편 ‘셰에라자드’와 ‘기노’를 겹쳐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여고생이 짝사랑하는 같은 반 남학생의 빈 집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셰에라자드’에서 빌려왔고, 부인이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장면은 ‘기노’에서 가져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 ‘셰에라자드’ ‘기노’를 중첩시켜 ‘하루키의 남자’라는 전형을 만들고(세 작품의 남자 주인공 모두 여자가 왜 바람을 피우고, 왜 떠나는지 알지 못하고, 상처 받기 두려워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아픔을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로 치유한다. 원작 소설에서도 가후쿠가 영화와 같이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바냐 아저씨’ 희곡을 듣고 연습한다. 하루키는 가후쿠를 바냐 아저씨로, 드라이버 미사키를 소냐로 설정했다.

바냐 아저씨와 소냐, 연극연출가 가후쿠와 드라이버 미사키

희곡 ‘바냐 아저씨’의 바냐는 누이동생의 딸 소냐와 시골에서 영지를 지키며 살아간다. 어느날, 죽은 누이동생의 남편인 블라디미로비치 교수가 대학을 퇴직하고 젊고 아름다운 옐레나를 데리고 돌아온다. 바냐는 매부가 겉과 달리 어리석은 속물이라는 사실에 실망한다. 그는 매부가 데려온 엘레나를 사랑하게 되는데, 속물인 매부와 엘레나 사이에서 고민한다. 소냐가 사랑하는 의사 르보비치 역시 엘레나의 매력에 빠진다. 그러던 중 블라디미로비치 교수가 자신의 땅과 저택을 팔고 도시로 나가겠다고 하자, 반평생을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게 된 바냐는 그를 권총으로 쏘지만 빗나간다. 큰 소동이 벌어진 이후, 블라디미로비치 교수 부부가 영지를 떠나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하루키는 왜 ‘바냐 아저씨’를 소설에 끌고 온 것일까. 자신이 창조한 남자들에겐 소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

소설 속 가후쿠는 차 안에서 “왜 그런 아무 것도 아닌 사내에게 마을을 빼앗겨 그 품에 안겼는지, 그 의문이 지금도 가시처럼 마을을 찔러”라고 말하며 괴로워한다. 엄마의 죽음에 죄의식을 갖고 있는 미사키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 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라고 답한다. 미사키의 대사는 명백히 희곡 ‘바냐 아저씨’ 소냐의 대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연극에서 소냐는 바냐에게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휴식이란 걸 모른 채 지금도 늙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라고 말한다. 영화에선 소냐 역을 맡은 이유나(박유림)가 수어로 바냐(가후쿠)에게 전달한다. ‘침묵의 몸짓’은 가후쿠에게 구원의 빛줄기로 내려온다(실제 이유나는 가후쿠의 머리 위에서 수어를 표현한다).

‘구원의 부재’를 ‘희망의 운전’으로

이때 카메라는 객석에 앉아있는 미사키를 비춘다. 소설에서 소냐의 위치에 있었던 미사키는 영화에선 관객의 자리에서 소냐를 바라보고 위안을 얻는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후쿠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처음엔 바냐 역을 피하려했다. “체호프는 두려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나와. 거기에 견딜 수 없게 됐어. 난 이 역에 자신을 바칠 수 없어”라고 토로한다. 그러니까, 언제나 내면으로 숨으려고만 했던 ‘하루키의 남자’는 체호프의 연극을 통해 자신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면서 아픔을 씻어낸다.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7편의 단편들의 공통점은 ‘구원의 부재’다. ‘하루키의 남자’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숨고, 도망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연극을 통해 희망의 언어를 전달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이 희망은 외로운 사람끼리 함께하는 연대의 드라이브로 부드럽게 뻗어나간다.

빨간색 사브 900의 핸들은 하루키, 엔진은 체호프, 운전은 류스케, 목적지는 상실을 겪고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

[사진 = 트리플픽쳐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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