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외로운 ‘기생충’들의 소박한 우정[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1820년대 미국 오리건주,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존 마가로)는 러시아인들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오리온 리)를 구해준다. 쿠키는 숲 속에 알몸으로 숨어있는 킹 루에게 옷과 음식을 주며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우연히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둘은 밤마다 마을에 한 마리 뿐인 젖소를 찾아가 우유를 짜고, 그렇게 만든 맛있는 스콘을 시장에 내다팔아 조금씩 돈을 모은다. 젖소 주인이자 마을 유지인 팩터(토비 존스)는 스콘 맛에 반해 쿠키에게 파티용 디저트를 주문한다. 쿠키와 킹 루는 팩터에게 들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돈을 벌기위해 다시 젖소를 찾는다.

영화가 시작하면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이 자막으로 떠오른다. 우정은 인간에게 편안한 안식처라는 것. 그러나 자본주의는 경제적 약자의 우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비주류로 밀려난 미국인들의 삶을 그려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미국 초기의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유대인 쿠키와 중국인 킹 루의 우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비판하고 인간의 가슴 따뜻한 연대를 보듬는다. 길 위를 쓸쓸히 떠돌던 두 이방인은 마치 발 없는 새처럼 정주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들에겐 편안하고 안락한 둥지와 거미줄은 없었지만, 기대고 의지할 ‘우정’이 있었다.

느릿느릿 조용하게 전개되는 ‘슬로우무비’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 그 밑바탕에 긴장감과 몰입감이 흐른다. 우유를 훔치다가 언제 들킬지 모르고, 팩터 일당의 추격으로 언제 잡힐지 모른다. 팩터가 제빵사 쿠키와 킹 루를 집으로 초대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팩터가 집 안에서 “더 강력한 처벌로 노동력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어느 대위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카메라는 창 밖에서 걸어오는 두 남자를 응시한다. 팩터의 젖소에서 훔친 우유로 만든 디저트를 들고 팩터 집으로 들어오는 그들이 곧 처벌받을 것이라는 암시 속에 우유 도둑의 운명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총 대신에 음식으로 서부극을 다시 쓰고 있는 ‘퍼스트 카우’는 가로로 넓은 화면을 포기하고 4:3의 수직적 구도로 두 인물의 소박한 우정을 강조한다. 활극과 총격전의 서부극이 백인 중심의 미국 신화였다면, 음식과 우정의 서부극은 이민자가 세운 나라의 정체성을 지닌 미국의 ‘팩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유를 훔쳐 음식을 만들어야만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고 살아갈 수 있었던 ‘아메리칸 드림’은 허상에 불과했다. 팩터가 강조하는 처벌과 응징이 자본주의를 작동시켰고, 결국 그것이 미국의 민낯이었다. 땅 속에 묻어있는 앙상한 뼈와 해골은 미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이 ‘퍼스트 카우’를 극찬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답고 시적인 영화”라고 호평했다). 1820년대 미국 배경의 ‘퍼스트 카우’와 2010년대 후반 한국 배경의 ‘기생충’은 느슨하게 닮았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상류층을 속이고 계략을 짜야하는 하층민이다. 상류층의 속물근성과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도 똑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기생충’의 기택(송강호) 가족이 근세(박명훈) 부부와 연대를 거부한 반면, 쿠키와 킹 루는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친구가 됐다.

‘기생충’에게 우정을!

[사진 =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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