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윤여정, 기억전달자[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서로를 구원하자’는 약속을 한 뒤에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하던 제이콥은 농장을 개척하고 운영하기 위해 모니카, 큰딸 앤(노엘 케이트 조), 장난꾸러기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과 함께 아칸소의 시골마을로 이주한다. 모니카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데이빗이 걱정스러운 데다 바퀴 달린 트레일러에서 사는 것도 못마땅하다. 모니카가 돈을 벌기 위해 병아리 감별사로 취직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아칸소로 찾아온다.

영화 ‘미나리’는 이민자들이 미국에 뿌리내리는 이야기다. 누구나 낯선 땅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제이콥은 한국적인 방식으로 미국에서 살아남길 바랐다. 미국 땅에 한국 농작물을 심어 한인들에게 팔겠다는 계획은 물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관에 봉착한다. 성공이 지상과제인 제이콥의 사고방식은 가족을 중시하는 모니카의 가치관과 충돌하며 파열음을 일으킨다. 그는 수평아리처럼 ‘폐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성공에 집착하게 되고, 그만큼 모니카와의 관계도 멀어진다.

부부간 갈등이 차곡차곡 쌓아질 무렵, 순자는 그들에게 ‘기억’을 전달한다. 트레일러에서 딸을 처음 만날 때, 그는 고춧가루, 멸치 등을 내놓는다. 모니카는 고향 음식에 눈물을 흘린다. ‘후각의 기억’은 강력하다. 오래 떨어져 지내다 서먹했던 모녀간의 정이 단숨에 회복된다. 순자는 “왜 울어? 멸치 땜에 울어?”라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모니카는 단순히 음식 냄새에 울지 않았다. 저 멀리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어머니의 정성에 감동했을 것이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관계가 좀 더 멀어질 즈음, TV에서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라는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순자는 딸과 사위가 한국에 있을 때 이 노래를 좋아했다고 말해준다. 모니카는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내가 이 노래를 좋아했어?”라고 반문한다. 제이콥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밥을 씹어 삼킨다. 부부는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미국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이다.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순자는 ‘청각의 기억’으로 넌지시 일러준다.

순자는 시냇물이 흐르는 옆 둔치에 미나리를 심는다. 그는 “미나리는 아무 데서나 잘 자라서 누구든 뽑아 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김치나 찌개에 넣어서 먹을 수도 있고 아플 땐 약도 되고… 원더풀 미나리”라고 말하며 ‘미각의 기억’을 일깨운다. 미나리는 이국땅에 정착해야하는 이민자를 상징한다. 농장이 화재로 불타면서 제이콥 가족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처지에 놓인다. 제이콥은 한국식 물찾기를 버리고 미국식 방법을 받아들인다. 그는 서서히 미국에 동화되는 중이다. 그렇게 뿌리내리기가 시작된다. 그도 미나리의 맛을 기억했다.

“데이빗, (미나리) 맛있겠다. 할머니가 좋은 자리를 찾으셨네.”

[사진 = 판씨네마]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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