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의 축제 이야기82] ‘유행소곡’이 트로트로 대성(大成)하다

단골 트로트 커버송 원곡자는 누구일까?

필자는 2019년 10월에 <귀주대첩 승전 1,000주년 관악 강감찬 축제> 총감독으로 축제를 총괄했다. 당시 강감찬 축제가 전국적인 축제로 떠오를 수 있도록 <강감찬 전국 가요제>를 참가 신청을 전국구로 받았다. 그런데 트로트 부분 참가자 중 열에 셋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들고 나왔다. 송가인 열풍 때문인지 100% 모두 이 노래의 원곡자를 이해연이 아닌 송가인으로 표기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트로트 대세들의 커버송에 뿌리를 짚어보고자 마음먹었다.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트로트 양식은 해방 후에도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트로트는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고통을 담아내고 상처를 치유하는 국민적 노래로 떠올랐다. <가거라 삼팔선> <단장의 미아리고개> <꿈에 본 내 고향> <전선야곡> 같은 불세출의 명작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이 노래들은 트로트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요즘 최고의 커버 송으로 자리매김했고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송가인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

1950년대 최고의 힛트곡 반열에 오른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다. 1957년에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음반이 발매되었는데 한국 전쟁 당시 어린 딸을 잃은 작사자의 경험에서 나온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고/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울고 넘는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애절한 가사도 심금을 울리지만 중간에 이해연이 직접 녹음한 대사로 듣는 노래가락도 애간장을 녹인다. 1950년대 중후반에 발표된 수많은 전쟁 관련 대중가요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작인데 요즘 트로트 지망생들이 원곡자 이해연을 모른다는 점이 안타깝다.

100년전 유행가 였던 ‘희망가’ 재조명되다

<미스터 트롯>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본선 3차전에서 정동원이 <희망가>를 부를 때가 아니었나 싶다. 무대 조명은 오로지 정동원만을 비추었고 어린 소년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담담해서 더 슬프게 다가온 <희망가>는 100여년 전 유행했던 노래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전후에 조선 청년들은 <희망가>를 부르면서 식민지 아픔을 달래며 현실을 질책했다.

조선 청년들 사이에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노래로 사랑받던 <희망가>는 그 당시엔 작자 미상 곡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희망가>의 원곡은 18세기 영국의 무곡(舞曲)이다. 이 곡이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성가(聖歌)로 불렀는데 이 곡이 찬송가에 실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 대중가요를 연구하는 학자들 자료에 따르면 1910년 기독교 신자인 임학천이 미국에서 들어 온 찬송가에 식민지 시대 희망이 없는 암울한 심정을 담은 가사를 붙여 ‘이 풍진 세상’이라는 곡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단번에 조선 청년들을 마음을 사로잡은 이 노래는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레코드 취입 가수로 알려진 채규엽(蔡奎燁) 음반에 <희망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채규엽의 희망가는 선풍적인 인기를 끈 최초의 레코드 취입곡으로 문화재청의 대중가요 목록 1호에 올라 있다.

에서 김다현이 불러 새롭게 조명을 받은 <님이여>는

한겨레 작사.작곡 정의송 편곡 김근동 원곡 정의송 노래로 천상의 목소리로 감동주었다. <레전드> 남진/ 혜은이/ 진성/ 김연자/ 박현빈도 감동에 눈물바다를 만들었고, 감동의 무대를 선사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를 연마한 김다현 양은 판소리 내공을 바탕으로 놀라운 가창력을 선보였다. 1회전에 출연해 김용임의 사랑님‘을 불렀는데 충격이었다. 12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무대였고, 심사위원 진성은 “원초적으로 인간의 목소리이다 훌륭한 무대를 본 것만으로 감개무량하다”심사평을 하였다.

유행소곡(流行小曲)의 시대

일제 강점기 대중가요는 <희망가>와 같이 찬송가에 뿌리를 둔 계몽 노래와 <시드른방초>와 같은 일본 엔카를 번안한 유행 소곡이 주를 이뤘다. 대중가요 연구 학자 김창남, 이명미 교수가 펴낸 문헌에 따르면 1920년~30년대 노래는 특별한 장르명이 없이 ‘유행가’ ‘유행소곡’ 등으로 불렸다고 나와 있다. 우리 전통 민요를 적극적으로 계승한 신민요와 구별하기 위해 유행가, 유행소곡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대부분 영화 음악으로 사용되어 <영화소곡>이란 작품집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 엔카의 번안곡이 유행했던 시절, 지금과 같은 창작 대중가요가 선보인 건 1928년부터라고 한다. 1928년 문수일 작사, 김서정 작곡의 <세 동무>를 창작 가요의 시발점으로 보는데 지금과 같은 트로트 형태는 1932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 옛터>를 거쳐 1934년 고복수 <타향살이> 1935년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부터 트로트는 단조 5음계와 2박자의 특유의 꾸민음을 지닌 노래로 정착해 굳건히 자리 잡았고, 고복수/ 이난영/ 장세정/ 남인수/ 백년설/ 진방남 같은 가수들이 등장하여 민족의 설움을 달래주며 큰 사랑을 받았다.

6.25 한국전쟁 상처를 치유한 트로트

6.25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아픔을 남겨준 비극적인 전쟁이다. 빗발치는 총탄 속에 흩어져버린 가족, 남과 북으로 갈려져 버린 형제자매, 이념 때문에 생이별을 한 연인들, 눈앞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비통함은 오롯이 트로트에 담겼고, 우리 민족은 트로트를 부르며 그리움과 아픔과 고단함을 달랬다.

6.25한국전쟁때의 트롯의 시작은 현재의 K-트로트를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 현인의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백설희 <봄날은 간다> 등은 6.25 한국 전쟁 이후 발표된 명곡으로 대중가요의 한 획을 긋고 있다. 특히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는 한국 시인(詩人)이 좋아하는 명곡 1위를 차지 한 바 있다.

필자는 현인 선생님의 <굳세어라 금순아>를 애창하고 사랑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더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이 대목을 부르면 당시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6.25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어도 느낄 수 있는 건 이런 트로트 덕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트로트가 또 하나의 역사책이라고 강조한다.

1950년대는 트로트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시기라고 단언하는 이들이 많다. 필자도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발아된 유행소곡이 <트로트>라는 장르로 자리매김 되었고, 서민의 감성을 적시며 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트로트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대중가요가 양산되었고, 이에 따를 부작용으로 격(格)이 떨어지는 트로트가 양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중가요 발전 측면에서 볼 때 1950년대 트로트 유행은 현재의 K-트로트의 밑거름이 되었다.

왜색이라는 멍에를 졌던 트로트

이렇게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공간, 6.25 한국 전쟁을 관통하면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트로트는 1960년대 초반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50~1960년대는 이전 반세기 동안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였다.

예를 들어 박재홍의 <유정 천리>는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곡으로 불려져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노래는 3.15 부정선거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개사하여 부르며 파란을 몰고 왔는데 그러나 이런 영광도 잠시, 1960년대 초반을 넘어서면서 왜색, 즉 일본풍이라는 질타를 받으면 본의 아니게 대중과 잠시 거리를 두었다.

6·25전쟁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움텄고 미군들을 통해 미국 문화가 스며들자 트로트의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다가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미풍약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트로트를 밀어내기 작업이 개시되었다. 왜색풍의 리듬과 비탄조의 가사가 군사정권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트로트를 저급한 문화라고 몰아부쳤다.

당시 한 신문은 트로트를 두고 "게다짝을 신고 팔자걸음을 앙금앙금 걷는 듯한 가락"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지탄 때문이었을까?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기러기 아빠> 백야성의 <잘 있거라 부산항> 진송남의 <사나이 순정> 등은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그러면서 1970년대 청바지 문화와 포크 음악이 등장하자 트로트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명곡의 자리를 차지했던 트로트는 청바지 문화로 상징되는 포크 음악과 정부의 금지조치에 밀려 외곽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들풀과 같은 강인한 에너지를 지닌 트로트는 다양한 장르를 흡수해 색다른 매력으로 국민 정서에 파고들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필자는 단연 1960년대 중후반에 활동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배신자>는 명곡 중의 명곡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배호의 <배신자>는 내일은 미스터 트롯에서 임영웅이 불러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음악이라고 해서 왜색이라는 멍에를 짊어졌지만 우리 트로트는 완전히 왜색을 벗겨냈고, 지금은 다양한 색깔의 K-트로트가 세계를 유혹하고 있다. 서양 문화가 처음 도입되었던 개화기 무렵, 우리 전통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문물을 받아들였음에도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우리 것으로 소화해 발전시킨 것을 보고 선교사들이 감동했다는 문헌도 꽤 많이 있다. 트로트도 출발은 일본 엔카였지만 색깔이 전혀 다르다. 엔카를 뛰어넘는 청출어람(靑出於藍), 우리내 정서를 담은 트로트는 우리 민족성을 닮았다.

나훈아, 남진, 이미자, 조용필, 그리고 트로트 신예들

우리 대중가요 역사에서 어느 한 가수가 그 시대를 대표한 케이스를 뽑자면 남진과 나훈아, 조용필이 아닐까 싶다. 1970년대 후반을 가왕 조용필이 지배했다면 그 이전 10년은 나훈아와 남진 시대였다고 본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은 <국제시장>의 모티브가 나훈아 남진이었다고 언론에서 토로했다. 윤 감독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수분들 중에서 영화로 만들었을 때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이 어느 세대일까 생각했는데 진정한 라이벌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선생님이 떠올랐다. 힘들고 어렵던 시절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준 두 분의 이야기와 시대를 담는다면 1천만 관객 영화가 되지 않을 까란 생각을 한다”는 인터뷰를 한 바가 있다.

목포출신 남진과 부산출신 나훈아는 1970년대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표하며 각기다른 외모와 음악 스타일로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남진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며 트로트, 고고, 디스코, 맘보, 삼바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다. 또 나훈아는 스스로를 ‘아리랑 소리꾼’이라고 칭하면서 ‘꺾기 창법’을 트레이드마크로 ‘물레방아 도는데’, ‘고향역’, ‘무시로’, ‘잡초, ‘갈무리’, ‘울긴 왜 울어’, ‘임 그리워’ 등 애잔한 노래로 트로트 황제라고 불렸다.

그리고 조용필은 대중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인기를 얻으면서 1980년대 대표적인 가수로 가장 선두에 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아트킨스'라는 그룹을 만들어 미8군 무대에 데뷔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1971년 <꿈을 꾸리>라는 데뷔곡을 발표했으나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76년 2번째 앨범에 실린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대 힛트를 쳤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1977년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다. 그러다가 1979년 방송출연 금지가 풀렸고 이후 <창밖의 여자> <한오백년>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친구여> <허공> 등으로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그리고 1982년 이후 일본 가요계 진출에 성공, 김연자를 비롯한 한국 가수들이 일본에 진출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트로트 시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트로트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지금, 트로트는 국민적 사랑을 받는 것을 넘어서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K-트로트가 K-팝 못지 않은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환영 받고 있다. 송가인, 임영웅 등 오디션 출신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사랑을 받으면서 나훈아, 남진, 진성, 주현미, 김연자 같은 레전드가 재조명을 받아 그야말로 트로트 전성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열기가 뜨거운 만큼 우려도 크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현재의 트로트 신드롬은 얼마 전까지 있었던 트로트 침체기의 반작용인 측면도 있다. 트로트가 대중문화계 중심에서 밀려나 소외된 상황에서 힙합과 같은 서구식 음악이 범람하자 그에 대한 반발이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 열풍을 만들어낸 것"이리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송가인, 임영웅, 영탁 등 트로트 오디션 출연자들이 방송가의 핫스타로 떠올랐다. 중년 세대 이상이 많이 보는 케이블 종편 채널에선 틀면 나오는 수준"이라며 계속 이렇게 과열이 된다면 이에 대한 역 발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필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는 대목이다.

필자가 두 번에 걸쳐 <트로트>를 진단해 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옛말에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일부러 트로트의 열기를 식힐 필요는 물론 없다. 그러나 베끼고 우려먹기 식의 트로트 오디션 열풍은 가라앉아야 된다고 본다. 대중의 마음은 언제나 움직이는 법. 트로트 오디션 방송 제작자들은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광고 카피를 트로트에 대입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KBS 2TV에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공연 같은 단독 방송을 예고했다.'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다시 한번 힘을 내자는 취지로 마련된 공연이다. 앞서 나훈아는 "코로나19 때문에 내가 꼭 공연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KBS는 오는 추석 연휴 실제 공연 같은 방송을 선보일 예정이다. 최고의 무대를 고집해온 나훈아 공연답게 KBS가 전사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대와 퍼포먼스를 준비할 예정이다. 이 공연은 30일 저녁 8시 30분 다시보기 없는 1회 방송으로 공개될 예정이다.KBS 2TV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제작진은 "처음부터 단순 방송 목적이 아닌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인 '공연'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라며 "온 마음을 다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보기 서비스 없이 방송될 예정이다. 본방 사수를 놓치지 말아달라"고 밝혔다.

한편 나훈아는 지난달 20일 한 곡 한 곡에 따뜻한 이야기와 삶의 해학을 담아 많은 이들이 마음이 따뜻해져 다시 한번 힘내길 바란다는 마음을 담은 새 앨범 '나훈아 아홉이야기'를 발매하였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공연은 KBS 2TV를 통해 30일 저녁 8시 30분에 방송된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유행이 다시 돌아올 때 그 시대를 방영하는 시대상이 덧입혀져 유행된 문화는 더 단단해진다. 트로트는 왜색이라는 오명과 정치적 압박으로 잠시 침체기였지만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장르로 다시 떠오르며 우리네 정통문화로서의 자리매김을 굳건히 하길 바랄뿐이다.

필자 소개

사단법인 한국축제문화진흥협회 이사장

대중문화 평론가

함양 산삼축제 총감독

대규모 행사기획 연출

양구배꼽축제 총감독

지리산 산청 곶감 축제 총감독

보성다향대축제 총감독

마포나루새우젓축제 총감독

남해 보물섬마늘축제 총감독

귀주대첩 1,000주년 관악 강감찬 축제 총감독 外 다수 역임

유튜브채널 국민안내양TV 기획제작

서울정원박람회

사랑의 행복콘서트 가요제

김제 효(孝) 콘서트

축제관련 TV토론. 라디오 출연. 포럼 패널. 강연 활동

KBS. MBC .UBC. TV조선. MBN 등 토크쇼 출연

(現)문화체육관광부 ‘문화의 달’ 자문위원

(現)파주시 축제자문위원장 (문화경제분야)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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