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아메드’, 마음의 문을 열어라[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선 도망치려는 소년이 있고, 그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또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잡아주는 이웃이 있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토마 도렐)은 아빠를 찾기 위해 보육원을 도망치는데, 나중에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실의에 빠진다. 시릴이 ‘폭력의 덫’에 갇히는 위험에 빠져들 때, 그의 처지를 알게 된 미용실 주인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는 그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민다. ‘아들’에선 아들을 죽인 소년을 자신의 목공소 조수로 받아들이게 된 아버지가 영화 마지막에 도망치는 소년을 뛰어가 붙잡는다.

‘소년 아메드’에서 무슬림 소년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는 자신을 어릴 적부터 가르친 이네스 선생님이 배교자라는 이유로 해치려 든다. 칼을 들고 이네스 선생님을 찾아갔던 그는 실패한 뒤 소년원에 들어가고, 농장에서 일을 배우다 또 다시 흉기를 손에 쥔다. 다르덴 형제는 종교적 광신주의에 사로잡힌 아이들의 ‘현재’를 다루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광신도가 되는가. 이러한 소년을 보듬기 위해 사회 공동체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하는가. 과연 아메드는 광신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아메드가 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소년의 등 뒤를 따라갈 뿐이다.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에도 아메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의 광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농장에서 어떤 소녀를 만나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낭만적 설렘이 잘못된 신념을 바꾸지 못한다. 아메드는 결국 추락한다. 첫 장면에서 뛰어올라가던 소년은 마지막에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때, 아메드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손에 쥐었던 흉기는 어떤 용도로 변할까.

마음을 굳게 걸어 잠궜던 아메드에게도 어느 순간 변화가 찾아온다. 그 배경엔 아메드를 이해하고 포용해주려는 부모와 이웃이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고, 소녀가 그러했으며, 이네스 선생님이 그렇게 했다. 광신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하는 인간 심리가 잘못된 신념과 만나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메드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이 있어야한다. 한번만 밟아서 폭주가 멈추지 않는다. 인내심을 갖고 여러번 제어를 해주어야 폭주의 속도가 줄어든다. 그 브레이크의 이름은 ‘인간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삭막하게 변한다. 연민은 곧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은 ‘언노운 걸’(2016)이다. 의사 제니(아델 에네)는 한밤 중 누군가 병원 문을 두드리지만 진료가 끝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음 날 병원 문을 두드렸던 신원미상의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제니는 소녀의 행적을 직접 찾아 나선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던 타인에게 연민을 느꼈다면, 제니는 문을 열었을 것이다.

당시 다르덴 형제는 인류학자 제르맨 틸리옹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언노운 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세상엔 누군가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여는 사람과 열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 문을 여는 사람은 문을 두드린 사람이 자신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열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아메드가 창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이네스 선생님은 문을 열었다. ‘연민’이라는 이름의 열린 문 사이로, 아메드의 광신은 사라질 것이다.

[사진 =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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