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웅, '맷돌춤'을 추다가 '각시탈'을 쫓다가 '남궁준수'가 된 남자 [이승록의 나침반]

[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박기웅이 늦는다길래 가만히 기다렸다.

인터뷰 시간 5분 정도 지나서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오는 저 남자가 박기웅이다. 긴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한다. "죄송합니다." 별로 늦지도 않았고, 서두를 것도 없었으나 괜히 눙칠 맘에 짓궂게 굴었다. "늦으셨네요?" 박기웅이 이번엔 커다란 눈을 꿈뻑인다. "오다가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진지하게 답하는 목소리. 내가 웃자 그제야 박기웅도 웃는다. 만면이 환하게 번지는 웃음소리. "음화하하!" 남궁준수다.

솔직한 남자였다.

멋있어 보이려고 폼 잡지 않았고, 깊어 보이려고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제가 원래 평소에 거울을 잘 안 봐요." 쑥스러워하며 씩 웃는 얼굴 자체가 미남이었고, "스태프 분들이 알아서 잘 해주시니까요. 전 연기에만 집중하려고요." 덤덤히 털어놓는 마음가짐이 눈처럼 깊었다.

MBC '꼰대인턴'에서 미워할 수 없는 악동 재벌2세 남궁준수를 마친 박기웅은 "끝난 것 같으면서도 끝난 것 같지가 않네요. 유난히 정이 많이 쌓인 것 같아요"라고 나지막이 고백했다.

"이렇게까지 모난 사람 없이 구성되기 쉽지 않거든요. 배우들끼리 성격의 합도 좋았어요. 아쉽고, 준수로 더 연기하고 싶어요. 유독 더 보고 싶네요."

'꼰대인턴'의 커다란 서사는 남궁준수를 중심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배역의 크기와 이야기의 비중이 아쉽지 않았느냐 물었지만 "배우를 길게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또 웃었다.

"그런 아쉬움은 이제 아예 없어졌습니다. 주인공 역할을 빨리 했던 편이에요. 2007년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2'였어요. 그 이후로 주인공도 하고 조연도 하면서 그런 마인드가 생기더라고요. '각시탈' 하면서 제 곁에 계시던 보조출연자 분들한테 정말 감사했거든요. 그 분들이 안 계시면 극이 이뤄질 수 없으니까요. 어떤 역할도 작품 안에선 결코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신(Scene), 한 신에 목숨 걸었다. 드라마였지만, 박기웅은 남궁준수의 제한된 장면을 철저히 연구하고 계산하며 마치 영화를 찍듯 한 신의 명확한 목표를 만들고 빈틈없이 연기했다. "남궁준수는 이 신을 놓치면 안된다"는 각오였다. 그것을 통해 박기웅은 "증명해 드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어떤 배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걔는 그런 걸 잘할거야. 그 쪽에 특화돼 있잖아' 하는 말을 전 좋아하지 않았어요. 배우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갖지 못한, 결핍된 걸 갖고 싶고 부러워하니까요. 신인 때부터 전,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물으시면 '스펙트럼이 넓고, 쓰임이 많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남궁준수 역할도 그랬죠. '보세요, 저 이런 것도 잘해요'라고 증명해 드리고 싶었어요."

삶이 배우다.

남동생과 함께 사는데, 여자친구는 없어도, 연기를 사랑해서 외롭지 않은 남자. 드라마를 보든, 영화를 보든,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든,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연기 재료를 수집하는 남자. "연기로 한 획을 그을 생각은 없다. 연기는 직업"이라면서도 그 직업을 "오래오래 길게 하고 싶다"고 갈망하는 남자.

박기웅은 초조하지 않다. 배역의 크기나, 배우의 인기나 박기웅에게는 '연기하는 삶'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처럼 연기를 즐기며 인생의 저 먼 지점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그래서 박기웅을 기다리는 건 지루하지 않다.

온다. 박기웅은 늦더라도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설레는 맘으로 지켜보면서 기다리면 된다. 저 멀리서 '맷돌춤'을 추다가, '각시탈'을 쫓다가, "음화하하!" 웃으며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박기웅. "역할에 대한 욕심을 버리니 연기가 즐거워졌다"고 웃는 박기웅이 이제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다.

[사진 =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MBC '꼰대인턴' 제공]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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