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접속', 정말 해피엔드였을까…짝사랑의 관점에서 [이승록의 나침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영화에서 전도연의 채팅 아이디는 '여인2', 한석규의 아이디는 '해피엔드'다. 전도연이 '해피엔드'의 의미를 묻자 한석규는 이렇게 말했다.

"우연히 어느 책 표지에서 봤는데, 그냥 현실에는 없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1997년 작품 '접속'은 20여 년 흐른 지금에 와서 보면, 아릿한 향수가 부는 한편 영화 속 사랑이 그때와는 다르고 조금은 빛바랜 색깔처럼 보여진다.

짝사랑의 관점 탓이다.

영화 속에는 짝사랑을 하는 여성이 둘 나온다. 전도연(수현 역)과 추상미(은희 역)다. 전도연은 친구의 남자친구 김태우(기철 역)를 몰래 사랑하고, 방송작가 추상미는 PD인 한석규(동현 역)를 혼자만 사랑한다.

비극적인 짝사랑이다. 이 남성들은 전도연과 추상미가 건넨 짝사랑을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폭력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김태우는 여자친구의 눈을 피해 전도연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데, 그의 말과 행동이 진심이라곤 없이 가볍기 짝이 없지만, 정작 짝사랑에 빠진 전도연에겐 김태우의 사소한 몸짓 하나도 마음이 요동치는 거대한 파도처럼 다가오고 만다.

여자친구와 잠시 헤어졌을 때, 김태우는 자신을 찾아온 전도연이 마음을 슬며시 고백하자, 느닷없이 입을 맞추나, 이내 진심 없는 충동적 행동이었음을 인정하듯 전도연에게서 입을 떼고 담배를 피운다. 전도연의 짝사랑에 깊고 깊은 상처를 남긴 순간이다.

한석규는 오래 전 자신을 떠난 여인을 잊지 못해 매일 현실에서 방황하고 추억에 갇힌 채 연명하는 남자다. 그런 한석규를 추상미는 동정하면서도 사랑하는데, 한석규는 추상미에게 자신의 마음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옛사랑과 닿을 수 있을 거란 기대 속에 자신과 채팅하던 '여인2'가 실은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좌절한 한석규는-마찬가지로 충동적으로-추상미를 돌연 찾아가더니 마음 없이 육체적 관계까지 갖는다.

이후 여전히 과거만 응시하는 한석규의 공허한 눈빛에 추상미는 "내가 필요했던 거 아니에요?" 캐묻지만, 한석규는 이기적이게도 "그래. 그때는 누군가 필요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라고 매몰차게 추상미의 짝사랑을 짓이긴다.

자신의 결핍을 타인으로 채우려는 사람들.

얼마 전 만난 한 작가가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자신의 결핍을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고 하지 마라"는 것.

누군가 내 안에 남긴 기억은 그가 나를 떠나는 순간 내 안에 '부재의 공간'이 되는 게 사실이며, 그 공간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가 이미 떠나고 없음에도, 영원히 그의 소유인 채 내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다른 사람으로는 결코 그 공간을 채울 수 없는 게 우리의 숙명이란 뜻이었다.

이 때문에 영화의 유명한 엔딩 장면을 보며 어쩌면 한석규는 자신의 결핍을 전도연으로 채우려고 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도연을 극장 밖에 오랫동안 세워둔 채 긴 시간 고민하고 망설인 한석규. 그가 겨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하자 경쾌한 'A Lover's Concerto'가 흐르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막 내리지만, 어쩐지 영화 뒤편에는 사실 비극적인 결말이 감춰져 있지는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바라만 보는 사랑도 있어요"라고 믿는 여자 전도연, 옛사랑이 죽었지만 그 기억의 바다에 여전히 잠겨 있는 남자 한석규. 그래서 엔딩 크레디트 위로 울려퍼지는 '사랑의 협주곡'은 왠지 한석규가 말한 아이디 '해피엔드'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느냐'고 물으며 냉소(冷笑)하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해피엔드. 우연히 어느 책 표지에서 봤는데, 그냥 현실에는 없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진 = 영화 '접속' 스틸, 포스터]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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