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시인의 선택[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20대 여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예술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3만 관객을 동원했다. 신종 코로나 여파로 극장이 한산해졌지만, 이 영화만큼은 타오르고 있다. 이같은 박스오피스 기록은 자국 프랑스에 이어 전세계 2위의 흥행 성적이다. 관객 분포도를 보면, 20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라스트신의 눈물이 마음에 사무쳤을까. 아니면 안타까운 사랑에 공감했을까.

줄거리는 이렇다. 18세기 프랑스의 외딴 섬,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인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결국 사회적 관습에 따라 헤어진다. 이들은 훗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도드라진 특징 중 하나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독특하게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신화를 읽어보자.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서는 그녀를 지상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저승의 신 하데스를 설득했다. 하데스는 돌아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믿어지지 않아 도중에 돌아서서 아내를 보았고, 이에 아내는 저승으로 되돌아갔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는 한 자리에 모여 신화를 함께 읽는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보는 결정적인 장면에서 세 명은 의견이 엇갈린다. 소피는 “아내를 잃을까봐 겁났다는 건 이유가 안된다”고 주장한다. 마리안느는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녀와의 추억을. 그래서 뒤돌아봤다.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잠시 생각에 잠긴 엘로이즈는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라고 답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사는 ‘시인의 선택’이다. 과연 시인의 선택이란 무엇인가. 마리안느는 일단 소피의 의견에 동의한다.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니까, 돌아보지 말아야한다”는 것.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른 뒤, 추억을 간직하는 선택을 내렸다고 해석한다. “연인이 아닌”이라는 말에 주목하자. 오르페우스는 살아 있고, 에우리디케는 죽은 상태다. 뒤돌아보지 않고 이승으로 데려나오면 연인이 되겠지만, 추억을 위해 돌아봄으로써 시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신화를 읽을 무렵,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던 때였다. 그러니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사랑하기 전에는 금기를 지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엘로이즈를 사랑하고 나서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동성애에 빠진 상황에서, 추억을 선택하는 것이 사랑을 더 오래도록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시인이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마리안느가 해석한 ‘시인의 선택’에 부응하듯,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먼저’ 뒤돌아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답한다. 어떻게보면,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처럼 이미 ‘죽은 사람’ 또는 ‘죽어가는 사람’이다(그가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장면을 떠올려보라).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다름 없다. 이제 ‘결혼이라는 제도’에 끌려가는 엘로이즈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마리안느와의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리안느의 ‘시인의 선택’이든, 엘로이즈의 ‘부름’이든 두 사람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통해 사랑을 영원히 추억하겠다고 다짐한다. 오르페우스는 이승에서, 에우리디케는 저승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듯, 이들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잊지 않는다. 한 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또 다른 사람은 둘만 아는 특정 숫자를 새겨놓는 방법으로 사랑을 봉인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시인이 되었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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