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설국열차’의 계급적 프리퀄 ‘기생충’, 봉준호 미학의 정점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플란다스의 개’부터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주제의식과 스타일에서 모두 연결돼있다. 그는 “마치 예쁜 숲의 바위나 돌을 들추면 축축한 느낌과 함께 온갖 벌레가 나오는 것 같은” 세상을 장르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현재 개봉중인 ‘기생충’은 그동안 쌓아온 영화적 내공을 기택의 반지하와 박사장의 고급주택에 응축해 폭발시킨다. 예컨대, 이 영화는 봉준호 미학의 정점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전설=‘기생충’의 지하남(박명훈)은 마치 ‘플란다스의 개’에서 경비원(변희봉)이 들려준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88년 올림픽 날림 공사 바람 속에 지어진 아파트의 입주 초기, 보일러 수리를 위해 초빙된 장인 ‘보일러 김씨’가 비리를 저지르는 현장소장과 시공업자와 몸싸움 끝에 죽었다는 이야기. 시체를 벽에 넣고 발랐는데 이후로 밤만 되면 보일러가 전라도 억양으로 울며 “보일러 돈다잉~” 소리를 낸다는 것.

‘기생충’의 지하남 역시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캐릭터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사채를 끌어쓰다 빚을 못 갚아 지하로 숨어든 그는 죽은 보일러 김씨가 구슬픈 소리를 내듯, 머리로 벽을 쿵쿵 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억울하게 죽은 보일러 김씨처럼, 지하남은 영원히 지상으로 나오지 못할 운명이다. 그가 햇빛을 받는 순간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패자부활전은 난망한 노릇이다. 한번 바닥으로 떨어지면 다시 일어서기 힘둘다.

‘설국열차’의 계급적 프리퀄=박사장(이선균) 집을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은 ‘남궁현자’다. 극중에서 멀리 외국으로 떠난 것으로 설정했다. ‘설국열차’의 보안설계자 이름은 남궁민수(송강호)다. 아마도 남궁민수는 남궁현자의 후손이 아닐까. 집이든, 기차든 무엇인가를 설계한다는 점에서 닮은데다 무엇보다 성씨가 같다. 봉준호 감독이 시치미 뚝 떼고 외국으로 멀리 보낸 이유는 ‘설국열차’와의 연계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작금의 한국과 먼 미래의 사회는 계급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 ‘기생충’이 계급사회를 수직으로 그렸다면, ‘설국열차’는 수평으로 펼쳐냈다. 인간사회의 계급은 나뉘어지기 마련이고, 혁명은 쉽지 않다는 게 봉준호 감독의 생각이다. 남궁민수는 이러한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1등칸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바깥으로 탈출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기차를 폭파시킨다.

따뜻한 좁은 공간과 무서운 넓은 공간=‘플란다스의 개’부터 그의 영화에서 좁고 어두운 공간은 따뜻한 분위기를, 넓고 밝은 공간은 무서운 분위기를 드러냈다. ‘기생충’의 반지하와 지하실은 어두컴컴한 곳이지만 그곳에선 식구가 모여 밥을 먹고 행복을 느끼는 공간이다. ‘괴물’에서 알 수 있듯, 넓은 곳은 공포스럽게 그린다. ‘기생충’에서도 화창날 날씨의 정원에서 비극이 벌어진다.

삑사리의 미학=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곧잘 넘어진다. ‘살인의 추억’은 논두렁에서 형사가 굴러 떨어지고, 심지어 ‘괴물’도 한강 고수부지를 뛰어 다니다가 미끄러진다. ‘마더’의 도준(원빈)은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헛발질을 하고, ‘설국열차’ 탑승객들은 도끼 들고 혈투를 벌이다 생선을 밟고 뒤로 넘어진다. 그는 그냥 슬랩스틱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적 슬랩스틱’이라고 했다. 리얼한 묘사라는 설명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생충’에서도 굴러 떨어지고, 넘어진다. 박사장네 지하실 계단에서 기택네 가족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단체로 뒤엉켜 떨어진다. 기택이 노상방뇨자에게 뿌린 물은 기어이 상대를 비켜 아들 기우에게 향한다. 큰 마음 먹고 수석을 들고 가던 기우 역시 예상대로 넘어진다. 심지어 기우를 미행하던 형사도 미끄러진다. 삑사리는 때론 폭소를 유발하는 유머를 발휘하지만, 너무 자주 쓰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봉준호 장르의 탄생=인디와이어는 “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됐다”고 평했다. 과연 그렇다. 그는 장르를 비틀고 전복시킨다. 그의 영화엔 코미디, 스릴러, 휴먼드라마, 공포 등이 뒤섞여 있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내몰린 인물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집요하게 관찰한다. 그러한 삶은 유쾌하다가 우울하고, 웃기다가 슬프고, 재미있다가 섬뜩해진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모두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며 살아간다.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성적 긴장감=봉준호 감독은 서스펜스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성적인 텐션(긴장감)을 곧잘 활용한다. ‘마더’를 떠올려보라. 아들(원빈)의 친구 진태(진구)가 미나와 성적 유희를 즐길 때, 엄마(김혜자)의 흔들리는 눈빛은 서스펜스를 한층 끌어 올린다. 이 영화는 성적 욕망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엄마의 심리를 서브텍스트로 삼아 모성의 경계를 시종 흐릿하게 만든다.

‘기생충’에서도 기택네와 박사장네 인물들간의 성적 긴장감을 흥미롭게 유발한다. 기우(최우식)는 과외하는 도중에 박사장의 딸인 고2 여고생 다혜(정지소)의 손목을 붙잡는다. 기택 역시 좁은 공간에서 박사장 부인(조여정)의 손을 잡는다. 특히 후자는 둘 밖에 없는 은밀한 영역에서 벌어진 일을 관객이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긴장의 전압이 더욱 강렬하다. 두 장면은 이 영화가 유독 강조하는 ‘선을 넘지 말라’는 태마와 맞닿아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기우와 친구 민혁(박서준)은 유사 부자관계로 읽힌다. 민혁은 유학을 떠나기전 기우에게 고급과외 아르바이트를 소개하고 다혜를 부탁한다. 다혜는 내 여자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터부’와 함께. 그러나 기우는 첫날부터 금기를 어긴다. ‘기생충’에선 그렇게 하지 말라는 ‘선’을 넘는 인물들의 비극을 다룬다.

어둠의 세계와 희망의 빛=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그러나 끝없는 어둠의 심연을 파놓은 ‘마더’와 이미 지나간 사건에 대한 탄식을 담은 ‘살인의 추억’을 제외하면 한줄기 희망을 남겨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괴물’에선 박강두(송강호)가 데려온 아이 세주에게 밥을 먹이며 ‘선순환’을 그린다. ‘설국열차’는 인류가 절멸한 상태에서 두 아이를 남겨놓았다. ‘옥자’의 소녀는 옥자를 데리고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기생충’은 또 어떠한가.

봉준호 감독은 마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기생충’의 결말을 “슬픈 희망”이라고 했다. 누군가 박사장의 집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고 또는 영원히 못 나올 수도 있다. 이 슬픈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는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희망을 다짐한다. 견고한 계급사회를 고려하면 그의 다짐은 다짐으로만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앞이 안보이는 현실에서도 희망의 성냥불을 켠다.

그 불빛이라도 있어야 겨우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사진 = CJ엔터테인먼트, 싸이더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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