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시얼샤 로넌의 ‘갈매기’를 응원하며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영화 ‘갈매기’의 첫 장면은 연극 공연을 마친 이리나(아네트 베닝)가 박수를 받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마이클 메이어 감독의 카메라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천장을 응시했다. 이리나의 삶에 곧 허망한 일이 닥칠 것이라는 암시다. 그는 안톤 체호프의 원작 희곡의 4막을 맨 앞에 내세웠다. 이리나가 공연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 콘스탄틴(빌리 하울)에게 일어나는 비극과 맞닥뜨리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준 뒤 플래시백으로 1막의 첫 장면을 보여준다. 관객은 이리나와 콘스탄틴,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무거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살펴보게 된다.

안톤 체호프는 ‘갈매기’를 “코미디, 세 명의 여자 배역, 여섯 명의 남자 배역, 4막, 호수를 배경으로 한 풍경, 문학에 대한 많은 대화, 움직임이 적음, 다섯 푼짜리 사랑이야기”라고 했다. 그는 사랑의 마법에 걸린 호숫가를 떠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코미디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코미디로 연극이 상연됐을 때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2년 뒤인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비극으로 선보였을 때 호평이 쏟아졌다. 체호프의 코미디를 관객은 비극으로 받아들였다. 사랑에 실패한 콘스탄틴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모든 인물들의 사랑은 제 갈길을 찾지 못한다. 이게 비극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러시아 문학에 정통한 로쟈에 따르면, 체호프의 인물들은 “체호프의 등신들”로 불릴만큼 맥이 빠져있다. ‘바냐 아저씨’는 대학교수인 처남을 숭배하면서 25년동안 뒷바라지 하느라 잘난 소설가, 잘난 철학자가 되지 못한 인물이다. ‘벚꽃 동산’의 늙은 하인 피르스는 “인생이 흘러가버렸어. 산 것 같지도 않은데...”라고 탄식한다. ‘갈매기’의 이리나 오빠 소린은 결혼도 못하고 그토록 되고 싶었던 작가도 되지 못한채 죽음을 앞두고 있다. 체호프 작품 중에 이런 유형의 인물은 모두 2,355명이나 등장한다. 체호프의 작품을 읽는 것은 회한의 가득찬 나약한 인물의 삶을 공감하는 일이다.

니나는 체호프 문학과 결이 다른 특별한 캐릭터다.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는 콘스탄틴을 거부 하고 이리나의 애인이자 작가인 보리스(코리 스톨)에게 마음을 준다. 바람둥이 보리스에게 버림받은 니나는 아이를 잃고 삼류배우로 전락한 채 러시아 전역을 떠돈다. 그는 절망에 빠졌을 지언정,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니나는 “난 갈매기예요. 난 여배우지. 그래 맞아.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는거야.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괴롭지 않아. 그리고 나의 사명을 생각할 때는 인생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한다. 반면 콘스탄틴은 믿음이 없고 사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결국 최악의 결정을 내린다.

영화는 불안한 모습의 이리나의 얼굴로 시작해 ‘불길한 예감이 맞은 듯한’ 이리나의 표정으로 끝난다. 삶의 진실은 때론 얼굴에 스쳐가는 찰나의 표정이 말해준다. 라스트신의 그 얼굴엔 허무하고 공허한 삶의 비늘이 꿈틀거렸다. 보리스를 향한 집착과 아들에 대한 무시가 그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허공에 흩어지는 박수소리처럼 그의 삶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반면, 니나는 아픔과 상처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믿음은 괴로움을 견디게 해주었고, 사명감은 두려움을 떨치게 도와줬다. 미래의 꿈을 잃지 않은 니나의 마지막 표정은 상실감에 빠져 있는 이리나와 뚜렷이 대비된다.

시얼샤 로넌 역시 니나처럼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15년 6월 이 영화를 촬영할 때, 시얼샤 로넌은 연극경험이 없었다. ‘갈매기’ 이후 연극을 갈망한 그는 2016년 3월부터 ‘더 크루서브’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150여차례 공연했다. 시얼샤 로넌에게 ‘갈매기’는 연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니나가 사명감 갖고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시얼샤 로넌도 꿈을 향해 묵묵히 전진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니나같은 인물이 꿈을 이루기 위해 역경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니나에게 응원의 박수를! 그리고 시얼샤 로넌에게도.

[사진 제공 = 뮤제엔터테인먼트]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