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호밀밭의 반항아’, 전설의 파수꾼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는 문학 교수이자 ‘스토리’ 잡지 발행인인 휘트 교수의 질문에 대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니콜라스 홀트)의 대답으로 이뤄졌다.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평생을 글쓰기에 바칠 수 있겠나?”

강의실의 샐린저는 머뭇거린다. 아직 자신이 없어서다. 그는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3단계를 거친다. 그 답변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그렇다면 샐린저는 어떤 단계를 밟았을까.

퇴짜=그는 축가공업을 하는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였다. 아버지는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지만, 샐린저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글로 먹고 살기 힘들고, 재능도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퇴짜를 받은 샐린저는 어머니의 응원을 받아 글쓰기에 매진한다.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어머니에게 바쳤다.

출판사도 거듭 퇴짜를 놓았다. ‘스토리’를 비롯해 ‘뉴요커’ 등 당대 유명한 문학잡지는 “미안하지만~”으로 시작되는 거절 편지를 보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법하지만, 샐린저는 물러서지 않았다. 쓰고 또 썼다. 이야기가 약하다는 휘트 교수의 지적을 받아 들이고,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차였다. 당대 최고의 극장가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조이 도이치)은 샐린저가 군대에 있는 동안 무려 36살이나 많은 찰리 채플린과 결혼했다. 아버지, 출판사, 여자친구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샐린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도전=장편소설을 쓰라는 휘트 교수의 제안에 샐린저는 “난 단거리 선수예요”라고 답한다. 휘트 교수는 홀든 콜필드가 장편소설에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조언한다. 단편에 익숙했던 샐린저는 제대로 시도해보지 않았던 장편에 도전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캐릭터와 스토리 개발에 매진했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전장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전쟁은 참혹했다. 부대원의 70%가 죽었다. ‘트라우마’의 어원은 ‘뚫다’다. 트라우마가 샐리저를 뚫었다. 제대 이후에 지속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 청각은 점점 기능을 상실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선불교’로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갔다. 오래 시간 동안 명상과 요가로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성취=1951년, 근 10년 동안 매달렸던 장편 ‘호밀밭의 파수꾼’이 세상에 나왔다.16살 청소년 홀든 콜필드의 체제 반항적인 태도는 정치적 보수주의, 경제적 호황 속에 사회적 순응의 시대에 살았던 미국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의 반체제운동 ‘비트 운동’, 영국 진보주의 그룹 ‘앵그리 영맨’, 60년대 ‘반문화’ 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반항적인 캐릭터에 그쳤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홀든 콜필드는 순수를 사랑했다.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낭떠러지 옆에 서서 아이들이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것이다. 정말 되고 깊은 것은 그것밖에 없는 인물이 홀든 콜필드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만한 홀든 콜필드를 창조한 샐린저는 휘트 교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아무런 보상 없이 평생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출판도 거부하고 코니시에 집을 짓고 벙커 같은 작업실에서 평생을 글을 쓰며 생을 마무리했다.

대니 스트롱 감독은 ‘샐린저 평전’을 바탕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를 불러내 샐린저 인생과 오버랩시키며 인상적인 성장영화를 만들었다. 고교 시절 ‘호밀밭의 파수꾼’에 매료됐던 스트롱 감독은 40대에 그토록 원했던 샐린저 영화를 연출했다. 극중에서 휘트 교수가 질문을 던지고 샐리저가 답했던 것은 감독 스스로에게도 던진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관객을 향한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평생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에 바칠 수 있습니까.

[사진 제공 = 디씨드]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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