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어른도감’, 흐르는 시간과 쌓이는 시간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김인선 감독의 단편 ‘아빠의 맛’에서 초등학교 교사 황경언(공민정)은 어머니의 재혼을 앞두고 있다.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온 경언은 새로운 가족에 대한 호칭과 성씨 개명을 두고 고민하다 일곱 살 때 이후로 본 적이 없는 친아버지(김준배)를 만나러 간다.

경언은 치킨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대화는 툭툭 끊기기 일쑤다. 부녀에게 20여년의 시간은 ‘단절’이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 아이까지 낳았다. “나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잘 살아라”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경언은 화를 내며 “있는데, 어떻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만나러 오셨어야죠”라고 답한다.

경언과 아버지 사이의 20여년의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아무 것도 퇴적되지 않은 채 텅 빈 공백으로 세월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딸이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노력을 알 수 없었고, 딸 역시 아버지가 어떻게 살다가 배다른 동생까지 낳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흐르는 시간은 어느 것도 내 편이 아니다.

그러한 시간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김인선 감독은 시간과 가족을 테마로 두 번째 영화 ‘어른도감’을 내놓았다. ‘어른도감’은 철없는 삼촌과 철든 조카가 만나 특별한 가족이 되어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영화다. 철든 조카의 이름은 황경언(이재인)이다. ‘아빠의 맛’의 초등학교 교사와 이름이 같다. 김인선 감독은 같은 이름의 등장인물을 통해 아버지와 헤어진 이후 사춘기 예민한 시절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소녀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선물한다.

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중학교 1학년생 경언에게 생전 처음 보는 삼촌 황재민(엄태구)이 불쑥 나타난다. 어딘가 어수룩하지만 밉지 않아 보이는 삼촌은 형의 사망 보험금 8,000만원을 빚 갚는데 써버린다. 재민은 경언의 돈을 갚기 위해 약사 오점희(서정연)에게 접근해 돈을 뜯어내려는 사기극을 벌인다. 재민은 사기극을 둘러싸고 조카와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들려준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건 다시 돌려받지 못할 삶의 일부를 주는 거야. 목적이 뭐든간에.”

‘어른도감’의 사기극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삼촌과 조카가 서로 가까워지는 영화적 장치다. 사기극이 아니라 둘 사이의 친밀감이 중요하다. 이들은 삼촌과 조카가 아니라 ‘아버지와 딸’로 역할놀이를 하거나 한밤 중에 산에 올라 쏟아질 듯한 은하수를 바라보는 에피소드 등을 통해 서로에게 ‘삶의 일부’를 주었다. 여기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쌓인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고마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모든 감정들이 켜켜이 층을 이뤄 삼촌과 조카 사이의 정을 돈독하게 해준다.

쌓이는 시간은 모든 것이 나와 당신의 편이다.

[사진 제공 =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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