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 사회학적으로 ‘마더!’ 읽기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마더!’는 종교적 텍스트다. 감독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영화는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등 성경의 상징으로 가득하다. 8각형 저택은 지구이고, 마더(제니퍼 로렌스)는 자연, 남편(하비에르 바르뎀)은 신, 방문자는 인간이다. ‘마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인간의 무지와 무례가 자연을 파괴하는 이야기다. 감독은 “현재는 자연의 균형마저 완전히 깨져버리려 한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불안과 좌절을 느낀다”고 말했다.

시각을 달리해서, ‘마더!’를 사회학적 텍스트로 읽어보면 어떨까. 영화에 표현된 자연-신-인간의 관계는 현실의 민중-국가-자본의 관계와도 여러 모로 흡사하다. 마더는 민중이고, 남편은 국가이고, 방문자는 자본가이다. 탐욕에 찌든 자본가는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저택을 찾아오고, 국가는 민중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한다. 이렇게 보면, ‘마더!’는 자본가가 국가와 손을 잡고 지구와 민중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이야기다.

남편(국가)은 저택을 처음 방문하는 커플(에드 해리스, 미셸 파이퍼)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물론, 마더(민중)는 그들이 왜 왔는지 모른다. 국가와 자본은 늘 그렇게 결탁하니까. 어느날 커플의 두 아들이 난데없이 나타나 재산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인다(성경의 ‘카인와 아벨’ 이야기이지만, 재벌가 자손들이 상속 소송을 벌이는 일은 언제나 일어난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조문객들이 찾아오는데, 이것 역시 마더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이 저택을 약탈하고, 착취하기 좋은 공간으로 여기는 자본가를 연상시킨다. 그도 그럴것이, 마더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 마음대로 저택을 휘젓고 다닌다. 자본가는 민중의 삶에 관심이 없다.

여기서 국가의 태도는 자본가 편이다. 마더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꼼짝없이 수발을 든다. 그는 점점 지쳐간다. 그들을 내쫓고 싶지만, 국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조문객들이 찾아와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닐 때, 남편은 태연하게 말한다.

“그들에겐 위로의 시간이 필요해.”

‘마더!’에서 위로를 받아야할 사람은 마더 그 자체다. 더 많이 몰려 들어오는 사람들이 저택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을 때도 남편은 그들을 감싸기 급급하다.

“우린 저들을 용서해야 돼.”

마더는 점차 불안과 공포에 빠져든다. 천신만고 끝에 낳은 아기도 저들의 손에 빼앗긴다. 새로 태어나는 민중의 삶 역시 자본가에 의해 유린된다. 이제 마더가 숨을 쉴 곳은 어디인가. 누가 마더의 지친 어깨에 손을 올려줄 것인가.

마더 입장에서 보면 남편은 ‘악’이다. 남편은 자신을 숭배하는 자본가와 달콤한 밀월을 즐기기 바쁘다(그는 책상에 앉아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즐거워한다). 그는 마더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 민중의 아픔을 외면한다. 악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통찰대로, 정부의 통제를 넘어서는 자본의 전횡으로부터 혜택을 입은 소수의 글로벌 엘리트만이 자유와 안전을 확보하고 나머지 대다수 인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 회복불가능한 궁핍, 치유 불가능한 불안에 치명적으로 노출된다(‘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 중에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마더처럼, 이런 환경 속에서 탈출하기란 쉽지 않다. 자본가가 저지른 ‘부수적 피해’는 모두 민중의 몫이다.

여기서 다시 대론 아르노프스키의 말을 떠올려보자. 그는 “‘마더!’를 통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자연을, 지구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국가는 민중도 이렇게 대하지 말아야한다.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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