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헤어질 결심’이 칸 국제화제에서 공개됐을 때, 한 외신은 “히치콕의 ‘현기증’과 로렌스 케스단의 ‘보디 히트’가 아이를 낳아 동아시아에서 기르면 나올법한 영화”라고 평했다. 먼저, 박찬욱은 ‘현기증’을 보고 감독이 될 결심을 했다. “영화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감독”이 되길 원했다. ‘현기증’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현기증’은 과거 사건으로 고소공포증을 앓던 전직 형사(제임스 스튜어트)가 자신이 살리지 못했던 여성과 똑같은 여성(킴 노박)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수사 대상에 애정을 느끼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는 점 등이 닮았다. 형사 해준(박해일)이 남편 살해 의심을 받는 서래(탕웨이)의 아파트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대목에선 히치콕의 ‘이창’이 겹친다.

외신이 ‘보디 히트’를 소환한 이유는 ‘헤어질 결심’의 1부에 깔려있는 ‘필름 누아르’의 분위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비밀에 싸인 여자를 만나 ‘붕괴’되는 스토리는 누아르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실제 해준은 붕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서래는 국어사전까지 동원해 단어의 의미를 곱씹는다. 변호사 라신(윌리엄 허트)은 어느날 관능적인 유부녀 매티(캐서린 터너)를 만난다. 매티는 돈 많은 남편 에드먼드를 살해할 결심을 하고, 라신은 그녀의 계획에 말려들어가며 파멸에 휩싸인다. 여성 캐릭터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점이 ‘헤어질 결심’과 비슷하다. 그러나 플로리다의 무더위 속에 팜므파탈의 용의주도한 범죄행위를 그린 ‘보디 히트’와 닿을 듯 말듯한 사랑의 감정에 은은한 격정을 불러 일으키는 ‘헤어질 결심’은 결이 다르다.

박찬욱 감독은 버라이어티와 인터뷰에서 정서경 작가에게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1945)를 한번 봐두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주부인 로라 제슨(셀리아 존슨)과 한 가정의 가장인 의사 알렉 하비(트레버 하워드)는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다. 알렉이 로라의 눈에 들어간 먼지를 빼내 준 일을 계기로 역 부근의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들은 매주 목요일 만나 애정을 키워간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선을 넘으면 안된다는 금기와 어쩔 수 없이 서로 이끌리는 사랑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이 안개가 밀려오듯 이들을 휘감는다. 박찬욱 감독은 ‘밀회’의 핵심 정서를 끌고 들어와 누아르풍의 범죄 수사극에 접목시켜 ‘헤어질 결심’을 완성했다.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산에서 발원해 바다로 흐른다. 이 과정에서 형사와 피의자의 사랑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미스터리로 엮어 그물줄을 묶듯 팽팽하게 잡아 당긴다. 화려한 색감과 정교한 미장센은 거의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고, 대부분의 신과 신을 매치컷으로 연결시켜 이들의 사랑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전달한다. 폭발하는 듯한 감정의 분출은 없지만, 지그시 눌러담아 애끓는 사랑의 여운을 긴 파장으로 그려낸다. 박찬욱 영화 가운데 가장 강렬한 제목인데, 헤어질 결심이란 곧 영원히 사랑을 봉인하겠다는 결심이다. 서래는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바다에 묻었다. ‘박쥐’의 라스트신처럼, 사랑은 거대한 파도로 쉼없이 밀려온다. 망망대해 앞에 서 있는 해준의 모습을 보면 유치환의 시 ‘파도’ 가운데 한 대목이 떠오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

[사진 = CJ ENM]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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