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자 이즘', 주의(ism)로부터 망명한 자들의 로큰롤[김성대의 음악노트]

일단 제목부터 따져보자. 망명자 이즘. 망명자(亡命者)는 "자기 나라에서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박해 또는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나라에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을 뜻하고 이즘(ism)은 명사나 형용사에 붙어 '주의'나 '교리'를 가리키는 접미사다. 유추해보면 '망명자 이즘'이란 '이즘으로부터 망명하려는 자' 즉, 내 안의 주의와 주장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려는 의지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앨범의 모든 곡을 쓴 보컬 훈조는 이를 "내면의 망명"이라 일컫는다.

아톰뮤직하트(아뮤하)의 첫 정규앨범 '망명자 이즘'은 숲 속에 버려진 방패연(鳶)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동화책을 첨부해 세상에 나왔다. 동화는 다시 하늘을 날고 싶은 방패연이 지나가던 동물 세 마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상황을 차례로 다룬다. 처음 나타난 고라니는 "낯선 이가 두렵고, 나에게 도움될 것이 없으면 남을 도울 이유도 없다"며 연을 그냥 지나쳐 간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두 번째는 인간이 놓은 덫에 걸려 다리 한 쪽이 잘려나간 양이다. 양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식량을 갖다줘야 해 연을 도와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만약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너를 분명히 도왔을 것"이라며 양은 그와중에도 자기 양심만은 살뜰히 챙긴다. 마지막에 나타난 토끼는 연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고향에 있는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며 자신의 이빨을 부러뜨려 연에 묶는다. 공익을 위한 제보가 개인의 고통으로 돌아오는 부조리한 현실에 빗댄 이 토끼 이야기는 'Axiom'이라는 노래에 가사로도 반영됐다.

그래서 지금 훈조가, 아뮤하가 하고 싶은 말은 과연 무엇인가. 이즘을 벗어나는 것? 아니면 정의라는 것의 의미 또는 가치? 이들 음악이 만만치 않은 건 마치 수 십 권 정치철학서와 소설 등을 탐독해야만 이해할 수 있었던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의 2집을 닮았다. 가령 "연꽃의 향기는 멀어질 수록 더 맑아진다"는 뜻을 가진 '향원익청(香遠益淸)' 같은 곡은 닉 드레이크와 서울전자음악단, 킹 크림슨과 오아시스, 그리고 김현식까지 꿰고 있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고, '번개'라는 곡은 AC/DC('Thunderstruck')와 아이언 메이든('Losfer Words (Big 'Orra)')을 알고 들어야 곡이 전하려는 "정의로운 행동 뒤에 따르는 고통"의 뜻을 더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처럼 '망명자 이즘'은 특정 영화('인류멸망보고서', '월-E')와 소설('오발탄')을 비롯해 유명 솔로 뮤지션과 밴드 음악까지 두루 습득해야만 온전히 납득할 수 있는 음반이다. 쉽지가 않다.

'망명자 이즘'은 모든 곡들을 하나의 정서 아래 줄세운 콘셉트 앨범이다. 첫 곡은 '해후'. 과감한 변박으로 30초 안에 첫 완결을 짓는 이 곡은 어둡고 추상적인 가사에 예측하기 힘든 편곡과 코드 진행, 고삐 풀린 템포의 급작스런 반격을 통해 텍스트의 염세와 로큰롤의 야성을 짝지운다. "더 잃어버리기 전에 그리운 걸 멈춰요"라는 가사가 뇌리에 박히는 '향원익청'은 잦은 변박과 첼로 편곡이 돋보이고 불안과 초조, 공포가 혼재된 '호박별'은 강박에 가까운 리듬의 왜곡으로 아득한 희망 끝 망명의 시작을 알린다. 이어 베이스가 전면에 나서는 '번개'에선 박준형의 터프한 기타 솔로와 거의 솔로에 가까운 변덕스런 드러밍에 귀 기울여보면 곡을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다.

또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 선 '망명자'는 곡 중반 얼터너티브 록 풍으로 달려나가다 곧바로 템포를 바꿔 멜로딕 기타 솔로를 쏟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편곡에 정성을 들인 '범종'은 투박한 사운드 디자인에 박준형의 블루스 기타가 잘 어울려 작품의 허리 역할을 한다. 이어지는 '밀실'은 1분 대부터 출렁이는 베이스 프레이즈와 갱 오브 포 같은 신경질적인 기타 리프가 곡 중심을 제대로 잡아주는데, 특히 최예찬의 베이스 플레이는 이 트랙 외에도 마지막에 반전을 찍는 'Axiom' 등 앨범 구석구석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그렇게 '망명자 이즘'은 "명화의 한 순간처럼" 천천히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마지막 곡 '윤슬'로 32분 여동안의 망명을 끝낸다.

다시 제목 이야기. 빨간 자전거를 2시 방향으로 튼 남자의 뒷모습을 담은 앨범 재킷 속 '이즘'은 한자어다. 떳떳할 이(彝)에 어찌 즘(怎). '어찌 떳떳하겠는가'란 뜻일까. 동화책을 펼쳐 처음 마주하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영혼 만큼은 추방 당할 수 없나니"는 또 무슨 얘기일까. 종합해보면 '영혼은 추방 당하지 않았으되 이즘으로부터 망명한 자가 어찌 떳떳할 수 있겠는가' 정도의 의미가 되지만 이 역시 딱히 개운치는 않다. 예술이 늘 그랬듯 결국 해석은 작품을 감상한 각자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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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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