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전주성이 ‘빨갛게’ 물들다...ACL이어서 가능한 이색풍경

[마이데일리 = 전주 이현호 기자] 전주성에서 ‘녹색’이 사라지고 ‘빨간색’이 그 자리를 채웠다. A매치를 제외하면 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장면이다.

17일 낮 2시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포항 스틸러스와 나고야 그램퍼스(일본)의 2021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8강 단판전이 열렸다. 이 경기 승자는 같은 날 저녁 7시에 같은 곳에서 열린 전북 현대-울산 현대 승자와 4강에서 만나는 대진이었다.

8강 첫 경기 주인공은 포항과 나고야인데 왜 전주에서 경기를 했을까. 코로나19 여파 때문이다. 대회를 주최하는 AFC는 동아시아 권역 8강 2경기와 4강 1경기를 한곳에 모여 치를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전북 홈구장 전주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날 낮 전주성에 붉은색 옷을 두른 포항 팬들이 운집했다. 포항에서 버스 2대로 나누어 타고 온 서포터스 ‘강철전사’가 주를 이뤘고, 이외에도 서울 및 수도권에서 내려온 포항 팬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이들은 저마다 상기된 표정으로 ‘홈인 듯 원정인 듯 중립인 경기’를 기대했다.

포항 팬들은 N석과 E석, W석에 나누어 착석했다. 그중 N석은 전주성을 홈으로 쓰는 전북현대 팬들의 공식 응원석이다. 기존에는 N석에 녹색 유니폼과 녹색 깃발, 녹색 걸개가 가득했으나, 이날엔 모든 게 검붉은 색이었다. E석과 W석에도 포항의 붉은 유니폼을 입거나, 붉은 머플러를 두른 팬들이 앉았다. 포항 팬들이 본격적으로 응원을 시작하자 골라인 뒤에 있던 카메라들이 이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남의 집 안방에서 내 팀을 응원한 셈이다. 그렇다고 포항과 전북이 얼굴을 서로 붉힐 일은 없었다. 사전에 두 팀 서포터스끼리 협의했기 때문이다. 경기장에서 만난 포항 팬 A 씨(익명 요구)는 “전주성 올 때마다 당연히 원정석에서 포항을 응원했다. 그런데 오늘은 홈석에서 포항을 응원하게 됐다.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경험”이라고 들려줬다. 이어 “깨끗하게 사용하고 돌아가겠다. 오늘 이겨서 4강전에도 오고 싶다”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포항 팬 조세한 씨는 “여러모로 재밌는 상황이다. 8강전이 전주에서 열리고, 관중 입장이 가능하다는 소식에 고향(포항) 친구들과 함께 예매했다. 언제 또 이런 경기가 있겠나. 4강전은 수요일이어서 재방문이 어렵다. 오늘 꼭 이겼으면 한다”라고 들려줬다.

포항 팬만 있었던 건 아니다. 전주에 거주하는 전북 팬 정민구 씨는 “저 역시 포항을 응원하려고 왔다. K리그에서 한 팀이라도 더 4강에 올라가는 게 낫지 않겠나”라며 “잠시 후 열릴 전북-울산전 티켓도 구매했다. 당연히 전북이 이겨야 한다. 4강에서 전북-포항 매치업이 열리길 바란다”라고 했다.

포항-나고야전 결과는 포항의 3-0 대승. 포항 팬들의 응원이 통했다. 이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깃발과 걸개를 모두 들고 전주성을 빠져났다. 저녁 7시에 열린 전북-울산전 결과는 울산의 3-2 승. 결국 4강전은 포항-울산의 동해안더비로 성사됐다. 정작 집주인인 전북은 안방을 내어주고 구경만 하게 된 꼴이다. K리그라면 불가능했을 그림이며, ACL이어서 가능한 그림이 나왔다.

[사진 = 마이데일리 DB,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이현호 기자 hhhh@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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