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 떡 벌어진 블루스 뷔페, CR태규 'Blues Buffet'[김성대의 음악노트]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서 따져 우리 대중음악도 대중의 품에 안긴 지 꼭 100년이 되어 간다. 아주 오래전 일본과 서양에서 들어와 긴 시간 한국적으로 응용, 참작, 진화되어온 만큼 이제 우리도 웬만한 장르들은 굳이 해외 대중음반들에 손 뻗지 않고도 ‘내수 제작’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단순히 음악 종사자 수가 늘었다거나 장르가 다양해졌다는 면에서 뿐 아니라 소리의 질, 연주 수준, 노래의 표현력, 창작의 참신성 등 음악을 둘러싼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별 장르 차원에선 여전히 대중적인 것과 비대중적인 것으로 나뉘는 게 현실이라 재즈와 블루스, 록과 헤비메탈은 후자의 대표 영역이라 하겠다.

그나마 재즈는 ‘고급스러운 음악’ 또는 아무나 접근하기 힘든 ‘엘리트 장르’라는 대중적 인식을 업어 나름의 권위를 누리고 있고, 록과 헤비메탈도 오랜 기간 충성을 바쳐온 팬층이 있어 무너질 듯 그래도 버텨나갈 수는 있을 만한 수준은 되어 보인다. 하지만 블루스는 다르다. 한국에서 블루스란 권위나 팬층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신(scene)조차 없는 천덕꾸러기 장르 음악인 것이다. 재즈나 알앤비/솔(soul), 록과 틀림없는 음악 접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식에서 야생성, 귀넘김에서 이물감 때문인지 한국 대중은 유독 블루스에만큼은 정을 주지 않는다. 그 정도가 너무 철저하고 단호해서 때론 무서울 정도다.

블루스. 글쎄, 이 땅에서만 보자면 멀게는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과 윤복희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정도가 떠오른다. 이후로 오면 명혜원과 신촌블루스, 김목경과 윤명운, 채수영이 또 퍼뜩 스친다. 강허달림과 블루스 3김(씨 없는 수박 김대중, 김태춘, 김일두), 하헌진과 최항석, 찰리 정과 김인후(텔레플라이), 그리고 CR태규는 지금 우리가 몸소 체험 중인 ‘현재진행형’ 국내 블루스 아이콘들이다.

언급하지 않은 더 많은 뮤지션들이 있겠지만 대략 한 문단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블루스 계보는 앙상하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블루스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마냥 블루스를 좋아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왜냐하면 그것은 장르의 지속을 위한 관심과 지지 이전에 취향과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호소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CR태규는 자신의 새 앨범으로 한국 대중에게 블루스를 한 번 들어보자고 말한다. 제목도 ‘블루스 뷔페’다. 입맛대로 골라 들으라는 얘기인데, 그렇다고 수록 곡이 31곡은 아니고 딱 먹기 좋은 10곡이다. 그리고 이 10곡은 통상 블루스가 가진 매력, 특징을 알차게 머금어 장르로서 자신을 조목조목 소개해 나간다. 블루스가 느리고 한 숨 섞인 장르(물론 이건 부분적인 얘기다)라는 걸 짧게 들려주는 ‘On The Platform’은 그 인트로 격이다. 그리고 그 후줄근한 플랫폼을 박차고 이내 지지 탑의 부기 넘버 ‘La Grange’를 닮은 ‘행복회로’가 일렁이면 이제 여기서부터 CR태규의 ‘할 말’이 본격화 된다.

그렇다. 블루스는 눈치 보지 않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채 ‘내 할 말’을 하는 장르다. 위선도 가식도 심지어 언어적 문법도 블루스 가수에겐 사치다. ‘행복회로’의 가사를 보자. 보통은 이 노래를 ‘행복’으로 이르는 ‘회로’에 관한 것이리라 짐작하겠지만 CR태규는 그런 거엔 관심 없는 듯 이렇게 노래한다.

"행복회로 광어회로 / 행복회로 우럭회로 / 한치앞도 모르는 세상 / 그럼 난 한치회로 (…) / 돈이없지 가오가없냐 / 그럼 난 가오리회로(…) / 이젠 거의 도달했어 / 그럼 난 도다리회로"

한마디로 블루스 가사엔 자조와 풍자, 해학이 있는 것이다. 복잡하진 않아도 랩처럼 라임도 있고, 좀 나른할지언정 록에 버금가는 분노(와 냉소)도 있다. 대신 블루스는 이 모든 것들을 압축적으로 펼친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니들이 원하는 것은 항상 불일치야”가 가사의 전부인 ‘불일치 블루스’나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을게”를 줄인 ‘할말하않’, “말도 안되고 앞이 깜깜하고 빌런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정신줄은 놓지 말”라고 충고하는 ‘Hold Your Mental Line Tight’는 그 예들이다. 들어보면 말장난인데 듣다보면 장난이 아닌 ‘청청청’도 마찬가지. 느려도 그루브가 있고 웃겨도 가시가 있는 블루스의 ‘할 말’들은 이처럼 경제적이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덜컹거리거나 뒤뚱거리는 리듬 위에 때론 천연덕스럽게 때론 치밀하게 꽂히고 맺힌다.

그리고 기타. 블루스는 기타의 장르다. 아니, 내가 블루스를 좋아하게 된 건 기타 때문이라고 말을 해야겠다. 그래야 레이 찰스나 베시 스미스, 리틀 월터를 좋아하는 블루스 팬들이 오해를 않을 테니. 그리고 그 기타는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로 나뉜다. 블루스에서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의 차이는 아주 커서 아예 그 분류로 팬 층이 나뉠 정도다. 가령 빅 조 윌리암스나 선 하우스가 어쿠스틱 파라면 비비 킹과 스티비 레이 본은 일렉트릭 파일 것이다. 그리고 머디 워터스와 존 리 후커는 둘 사이 선구자격이 되겠다.

CR태규도 블루스를 할 때 주로 기타를 쓴다. 기타 중에서도 어쿠스틱 쪽이다. 이른바 ‘델타 블루스’라 일컫는 장르 쪽에 그의 블루스는 다가가 있다. 이 음반에선 쓸쓸한 올갠이 더해진 ‘방랑자 (feat. Imawang)’ 정도가 그 원칙 내지는 공식에서 벗어나 있을까, 다른 거의 모든 곡들은 흙에 묻고 땀에 절은 어쿠스틱 블루스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다. 블루스가 재즈와 공유하는 특징인 비범한 즉흥 연주(Improvisation) 같은 건 없어도 CR태규만의 첨벙거리는 기타 리프와 공허한 보컬은 음악에서도 가사에서도 살코기만 추구하는 블루스의 참 맛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사실 이 앨범의 백미는 7번 트랙이다. 제목은 ‘블알못’. ‘블루스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블루스를 모르는 사람들 마음이 블루스로 충만(‘블심’)해질 수 있도록 내가 블루스를 알려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말라는 게 이 곡의 가사요, 저의다. 여기엔 슬라이드바라는 블루스 기타의 가장 영양가 있는 친구가 등장하는데, 천천히 그러나 꼼꼼히 지판을 누비며 블루스의 심줄에 탄력을 입히는 역할을 한다. 물론 거기엔 부디 이 음악이 이 땅의 ‘블알못’들에게 보다 널리 전해지길 바라는 CR태규의 간절한 마음, 글쓴이의 소박한 바람도 함박 녹아 있다.

[사진제공=CR Records]

*이 글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필자약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마이데일리 고정필진

웹진 음악취향Y, 뮤직매터스 필진

대중음악지 <파라노이드> 필진

네이버뮤직 ‘이주의 발견(국내)’ 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