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여자' 작가 홍상수가 여성의 자유의지를 들춰내는 방식 [이예은의 안테나]

[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이게 바로 작가 홍상수다. 주로 지질한 남성을 이야기 중심에 배치하고 주변의 여성으로 하여금 인간 본성을 까발렸던 홍상수 감독이 영화 '도망친 여자'로 그의 작품 안에서 가장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펼쳐냈다. 인물의 본색을 끄집어내기 위해 쉴 새 없이 담아냈던 술과 담배도 이 작품에선 최소화됐다.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노골적으로 관념과 철학을 투영시켰던 이전과 달리 가장 보편적인 대화들로 은근하게 관객에게 침투한다. 작가 홍상수의 세계는 이렇게 또 한번 확장됐다.

구조는 간단하다. 주인공 감희(김민희)가 번역가인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에 영순(서영화), 수영(송선미), 우진(김새벽)을 차례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남편과 이혼한 뒤 룸메이트 영지(이은미)와 살고 있는 영순이다. 영순은 대출을 끼고 집을 샀다. 작은 텃밭을 가꾸고, 이웃집 학생과 친구처럼 지내고,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등 소소한 삶을 누린다.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고기를 좋아하는 감희를 위해 오랜만에 폭식도 했다.

이어 필라테스 강사를 하면서 큰 돈을 모은 수영의 집을 찾아간다. 수영은 여러 남자들과 엮이며 '복잡하고 귀찮지만' 즐겁게 지내고 있다. 감희는 그런 수영을 바라보며 "재밌어 보인다"라며 수영의 삶을 응원한다. 세 번째로 만난 우진은 의도치 않은 만남 상대다. 우진의 남편 정선생(권해효)와 얽힌 사연이 있다. 그런 우진이 감희는 불편하지만, "방송에 나와 똑같은 말만 하는 남편이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다 가짜다"라고 말하는 우진에게 점차 마음을 열며 꽤 오래 대화를 나눈다.

세 여자는 자유롭다. 매사 솔직하진 않지만 인생의 주체가 본인이다. 영순은 이혼 후 대출을 받아 자신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고 돈도 모은 수영은 남자들을 선택하는 입장이다. 우진은 감희와 달리, 남편의 위선적인 면을 가감 없이 지적한다. 감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확인받으려는 듯 질문을 던지지만 이들은 여유롭다. 대화의 정적은 그 순간 찾아온다. 그리고 영순, 영지, 우진이 자리를 비웠을 때 창문을 열어 바깥을 멍하게 응시하거나 바다의 파도를 가만히 바라본다. 영순의 CCTV 화면, 수영의 인터폰 화면에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감희는 연신 "이렇게 남편과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야. 결혼하고 5년간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무조건 붙어있어야 한대"라고 변명하듯, 혹은 자랑하듯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곧,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도망친 게 아니라 잠깐 내 스스로 자유를 선택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런 감희의 눈빛은 어딘가 다급하고 공허하다.

그러더니 정선생을 만나고 처음으로 감정을 터뜨린다. 영순에게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어. 이제는 지겨워.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계속 해야 하잖아"라고 말하던 감희는 정선생에게 "똑같은 말만 하는 게 어떻게 진심이냐. 그건 다 가짜다. 그냥 말을 많이 하지 말아라"라며 윽박을 지른다. 마치 남편에 의해 지루한 삶을 감내하며 사는 자신을 겨냥한 것처럼. 그리고 감희는 은미한 미소와 젖은 눈으로 다시 스크린 속 파도를 바라본다.

홍 감독답게 담아낸 여성들의 이야기다. 각각 다른 케이스로 자유의지를 논한다. 등장하는 여성 모두 남자들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계의 위치를 결정한다.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든 이를 언급하는 성별은 모두 여자다. 그나마 등장하는 세 명의 남자는 인간 이기주의를 전시하거나, 사랑에 구걸하거나, 명성에 굴복하거나 등 원초적인 모습만 선보이고 사라진다. 세 남자의 모습은 모두 뒷모습만으로 처리됐다. 여성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겠다는 홍 감독의 의도다.

전작들에서 술의 힘에 기대 토해낸 속내들은 사라지고 말끔하고 세련되게 변화했다. 구질구질한 성토가 아닌 이성적인 대화 안에서 발견하는 본색은 보다 더 흥미롭고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다. 무엇보다, 관객의 해석에 따라 다르겠으나 '도망친 여자'는 의식하지 않는 이상 홍 감독의 개인사를 연상케 할 연결고리가 거의 없다. 그래서 온전히 감희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홍 감독의 지난 작품들에서 제3세계를 유영하듯 기묘했던 김민희는 가장 일상적인 인물로 현실에 발을 디뎠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인물은 미묘한 감정 떨림까지 얼굴에 담아내는 김민희의 저력 덕에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사랑스럽다가 처연하고, 예민하다가 안타깝다. 짧게 자른 머리 때문일까. 일부 장면에선 드라마 '굿바이 솔로'(2006)를 연상하게 하는 풋내음도 느껴져, 그를 다양한 결의 작품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진다.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은 언제나처럼 홍 감독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를 소화해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서 '아무것'을 발견하게 되는 신비로운 경험, 홍 감독만의 저력이다. 오는 17일 개봉.

[사진 = 전원사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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