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의 이 남자는 배우 주석태인가, 스토커 문성호인가 [이승록의 나침반]

[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아주 일반적인 사랑이었죠. 서연이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랑이 잘못된 건 이정훈 때문이었어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는 배우 주석태인가, 스토커 문성호인가.

"서연에 대한 마음은 어떤 종류였죠?"라고 묻는 나는 대체 주석태를 인터뷰하는 기자인가, 문성호를 취조하는 기자인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건 내 앞의 이 남자가 주석태의 얼굴로 문성호의 눈빛을 한 채, "서연이를 사랑했다"며 "다 이정훈 탓"이라고 말하는데, 그 깊고 서늘한 목소리가 주석태이면서 문성호였기 때문이다.

주석태가 연기한 MBC '그 남자의 기억법' 문성호는 파장이 강한 캐릭터였다. 드라마가 평범한 멜로 드라마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문성호를 연기한 주석태의 존재 덕분이었다. "스토커 연기는 처음"이었다는 주석태는 문성호의 외형을 준비하며 영화 '세븐', '마담 싸이코' 그리고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토커 문성호의 내면을 완성한 건 오로지 주석태의 연기력 덕분이었다.

"연기력이요? 하하, 아니에요. 저 원래 지금보다 훨씬 연기 못했어요. 사실은 공대에 다니다가 취업 걱정에 자퇴하고 고향에서 장사를 해야 하나 고민했었거든요. 그때 제가 '남자 셋 여자 셋' 열혈 시청자였는데, 어느 날 '저기에 내 길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 모아둔 돈으로 연기학원 다니려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어요. 그렇게 학원에서 공부하다가 스물다섯에 00학번으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답니다."

대학생 시절 처음 선 연극무대는 단역이었지만 석 달을 연습해놓고도 실수연발이었고, 서른 살이 되어서야 데뷔한 영화계에선 냉정한 평가에 '내 대사가 그럴 듯하게 뱉기만 하는 연기였구나' 실감해야 했다.

그 탓에 매 순간 자신의 연기를 경계하는 배우였다. 영화, 드라마 가리지 않고 10여년 넘게 어떤 역할이든 뒤쫓고 있지만, 부족함이 느껴지면 늘 연습실에 들어가 연구하고 공부했고, 캐릭터와 하나가 되고자 몰두했다. "지난 작품들 속 제 연기를 지금 보면 낯간지럽다"는 주석태는 "지금의 문성호도 최선을 다했지만, 1, 2년 지나고 보면 분명 빈틈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안도하는 건,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제 과거의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는 건, 반대로 생각하면 제가 그만큼 나아졌기 때문에 보이는 거겠죠. 그렇게 믿고 '지금 잘하고 있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저 스스로도 '10년 뒤'의 제가 기대될 것 같거든요."

인터뷰 동안 딱 한번 주석태의 눈에서 스토커 문성호가 아닌 인간 주석태의 눈빛이 보였던 순간이 있다. 유기견과 유기묘를 기르고 있는 그에게 반려동물 질문을 하자 "강아지는 한 마리, 고양이는 여덟 마리"라며 "애들 사료값과 병원비가 출연료의 절반 이상"이라고 푸념하면서도 그 눈빛에 순수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 순간, 주석태에게 문득 "실제로 문성호처럼 누군가에게 집착해 본 적 있나요?" 묻자 그는 오직 주석태의 선한 눈으로 "아뇨, 성격이 소극적이라서요. 사람에 대해 포기도 빠르거든요" 말하며 수줍어했다.

아니다. 이 남자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제 영영 주석태를 기억에서 지울 수 없게 된 이유를 말이다. 비록 '주석태'란 이름을 지금 당장 우리가 떠올리진 못할지라도, '그 남자의 기억법'을 본 우린, 아마 '10년 뒤'에도 주석태가 그토록 집착해 만들어낸 스토커 문성호는 결코 잊지 못할 게 틀림없다.

서연의 유골함을 들고 눈물을 흘리더니 저주의 말을 내뱉고 최후를 맞이한 남자. 지금 내 앞의 이 남자는 배우 주석태도, 스토커 문성호도 아닌 하나의 악을 창조하고 스스로 파멸시킨 '연기 스토커' 주석태였다.

이 '연기 스토커' 주석태는 '10년 뒤' 또 어떤 인간을 창조해냈을까. 그때가 되면 주석태는 지금과 전혀 다른 해맑은 미소로 새롭게 누군가를 집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아끼는 영화가 무엇인지 묻자 문성호의 목소리로 주석태가 이렇게 답했기 때문이다.

"제 인생 영화요?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이티(E.T.)'입니다."

[사진 = 탄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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