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길을 잃은 찬실에게 해답은 비움이었다 [이예은의 안테나]

[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우리는 늘 비움과 채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채움을 위한 첫 발이 비움인 걸 머리론 알지만, 용기를 필요로 하는 비움으로 닿기까지가 쉽지 않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는 이 순간을 기세 있게 밀어붙인다. 취약점을 들춰내고, 반추해야 하는 순간을 경쾌하게 펼쳐내면서 비움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한평생 시네필로 살아온 찬실(강말금)은 유명 독립영화 감독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줄곧 함께 해온 감독이 돌연 술을 마시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신작 크랭크인을 앞둔 순간에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할 일이 사라진 찬실은 그대로 짐을 싸 산동네에 위치한 복실(윤여정)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 허무맹랑한 현실에 전투력은 상실했지만 먹고는 살아야 한다. 그렇게 절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가사도우미로 취직을 하는데, 영화인이라는 본업은 지키고 싶었다.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비수들뿐이었다. 그래도 마냥 무너지란 법은 없나보다. 소피의 프랑스어 과외 선생 영(배유람)에게 설렘을 느끼며 사랑을 꿈꾼다.

오즈 야스지로를 찬양하는 자신과 달리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해 실망스럽긴 하지만, 영은 "이 나이까지 결혼도 안 하고 일만 하고 살았던" 찬실에게 새로운 감정을 선사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의문의 남자(김영민)까지 주위를 맴돌며 신들린 조언을 해주니 위안이 된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주인집 할머니 복실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외롭진 않은데, 이미 지나간 일을 놓지 못해 괴롭고 공허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다. 이런 찬실과 달리 복실은 "난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해. 대신 애써서 해"라며 콩나물을 다듬고 한글 공부에만 열중한다. 어딘가 그는 죽음에도 초연해 보인다. 장국영은 끊임없이 영화에 대한 초심을 이끌어내고 근본적인 꿈을 건드린다. 그래서 찬실은 결심한다. 지난 시간과는 이별하고 비워내기를.

의지와 상관없이 졸지에 실직, 지인의 가사도우미로 들어간 찬실의 상황만 떼어서 보면 절망적이기 그지없다. 하지만 영화는 조금의 울적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따뜻하고 발랄하다. 현실 대화에서나 들을 법한 일상 유머는 이러한 톤을 유지하기에 좋다. 찬실의 낙망도 유한할 것임을 명확히 해 웃음에 뒤끝이 없게 만든다. 상황을 유쾌하게 다루면서도, 바라보는 건 객관적이고 담박하다. 어설픈 위안을 건네지도 않고, 억지로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장치를 넣지 않으면서 페이소스를 남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진짜 복은 강말금이다. 말간 그의 얼굴이 스크린에 떠오르면 어딘가 달뜬 기분이 든다. 연기는 감탄의 연속이다. 오리지널 사투리 덕분에 캐릭터가 현실에 밀착돼있는데 그 사투리와 독특한 화법이 은근하게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느끼게끔 만든다. 정형화되지 않은 솔직한 연기에 관객은 매료되고, 재치 넘치는 연출로 완성된 영화에 기묘한 매력이 더해진다.

강말금의 얼굴을 빌린 찬실이는 결국 우리였다. 찬실은 "영화 프로듀서가 뭐하는 건데?"라는 복실의 물음에 "나도 몰라요"라고 답한다. 인생의 전부로 여겼던 일이 흐릿해진 순간이다. 그럼에도 찬실은 젠체하는 대신, 혼란을 인정한다. 비워낼 준비가 시작된 시점이다. 그동안 모아놓은 물품들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시나리오용 노트북만 남겨둔 찬실은 비로소 앞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어두운 밤길, 후배들의 시야를 확보해주기 위해 뒤로 물러나 손전등을 비추던 찬실은 제 손에 들린 그 빛이 자신의 새로운 길을 비추고 있음을 알게 된다. 비움으로 향하는 달갑지 않은 모험. 결론을 내는 정답은 없어도 그것이 곧 해답을 이끌어내는 희망이다. 다시 채워갈 여정에 설렘이 생긴다.

[사진 = 찬란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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