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길·오상욱, 냉철한 승부 속에서 꽃핀 '브로맨스' [이후광의 자카르타 챌린지]

[마이데일리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이후광 기자] 사상 첫 아시안게임 3연패와 병역 혜택. 두 선수는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냉철한 승부의 세계에서 동료는 순식간에 적이 돼버린다. 결국 형은 접전 끝에 동생을 이기고 새 역사를 썼다. 그러나 웃음이 아닌 눈물이 났다. 형은 동생의 앞길을 막은 것만 같아 괴로웠다.

지난 20일 밤(한국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센터에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펜싱 남자 사브르 개인전이 열렸다. 구본길(29, 국민체육진흥공단)과 오상욱(22, 대전대)은 예선 전승과 함께 16강, 8강을 넘어 준결승에 안착했다. 먼저 형 구본길이 오후 9시 홍콩의 로우호틴을 15-4로 가볍게 누르고 결승에 올라갔다. 20분 뒤 동생 오상욱은 이란을 알리 파크다만을 만나 접전에 접전을 거듭하다 15-14 신승을 거뒀다. 대표팀 선후배 간의 결승전이 성사된 순간이었다.

구본길은 자타공인 사브르의 최강자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연달아 제패했고,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2017-2018년 세계선수권 단체전 2연패로 그랜드슬램을 이뤄냈다. 이제 구본길에 남은 목표는 단 하나. 사상 첫 아시안게임 3연패였다. 반면 오상욱은 이번 대회가 커리어 첫 아시안게임인 한국 펜싱의 기대주. 그 역시 병역 혜택이 걸려 있는 금메달이 간절했다.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한 두 검객의 칼은 날카로웠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승부였다. 2라운드부터 동점에 동점이 거듭됐다. 12-12에서 먼저 앞서간 건 형 구본길. 이어 구본길이 한 점을 더 달아나자 동생 오상욱이 비디오판독을 요청했다. 결국 승부는 14-14까지 갔고, 적막이 흐른 컨벤션센터에서 세 차례의 동시타가 나왔다. 마지막 동시타에서 심판의 선택은 구본길이었다. 아시안게임 3연패를 이뤄낸 구본길은 오상욱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치열했던 승부를 마무리했다.

경기 후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에서 두 선수의 뜨거운 브로맨스가 펼쳐졌다. 패자보다 승자에게 더 가혹했던 승부였다. 믹스트존에 등장한 구본길은 “3연패라는 기록 때문에 후회 없는 경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후배에게 더 좋은 혜택이 있었던건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후배의 앞길을 막았다는 생각에 3연패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그는 “기쁘지만 마음이 좋지 않다. 후배가 금메달을 땄더라면 더 좋은 길이 열렸을 것이다. 마음이 걸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오상욱은 승리의 감동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형이 걸렸다. 물론 패배는 아쉬웠다. 그는 “목표를 금메달로 했는데 한 점차로 패해 아쉽긴 하다. 마지막 공격이 무승부 같았지만 심판 판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구본길 형이 미안해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오상욱은 “경기 후 형이 내게 미안해하는 게 너무 느껴졌다. 난 진짜 괜찮다. 오히려 형 때문에 많이 배운 경기였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브로맨스’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구본길과 오상욱은 오는 23일 사브르 단체전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노린다. 이미 메달을 목에 건 구본길은 동생의 첫 금메달을 위해 기꺼이 ‘우승 청부사’가 돼야 한다. 구본길의 각오는 남달랐다. 그는 “단체전에선 내 모든 걸 쏟아 부어 후배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바람을 남겼다.

오상욱은 취재진에게 형 구본길이 결승전 직후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전한 말을 공개했다. “단체전 때는 금 색깔로 목에 걸어줄게” 동생을 향한 형의 진심 어린 약속이었다. 오상욱은 “구본길 형과 같이 꼭 좋은 모습으로 단체전을 치르고 싶다. 단체전에선 꼭 금메달을 따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구본길과 오상욱. 사진 = 인도네시아 곽경훈 기자 kphoto@mydaily.co.kr]

이후광 기자 backlight@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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