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엘르’, 크로노스의 세계를 전복시키는 여성의 게임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는 게임영화다. 극중 게임의 형식을 통해 남성의 폭력성을 제거하고, 나약함과 위선을 깨닫게 해준다. 그는 남성의 뒤틀린 세계를 깔끔하게 정리한 뒤 여성성을 더욱 공고하게 간직한 채 유유히 길을 떠난다.

언제나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인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무시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그는 계속되는 괴한의 접근에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미셸은 친구 안나(앤 콘시니)와 함께 게임회사 크로노스를 차렸다. 크로노스(Cronus)는 그리스신화에서 냉혹한 폭군 또는 비정한 아버지 등으로 묘사됐다.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크로노스는 날카로운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거세시킨 뒤 최고의 신이 된다. 그는 자식들 중 한 명이 지배권을 빼앗을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자식들을 태어나자마자 삼켜버린다. 크로노스의 부인 레아는 기지를 발휘해 막내 제우스를 살려내고, 제우스는 장성한 후 아버지를 가두고 최고의 신 반열에 오른다.

미셸 회사가 만드는 신작게임은, 그의 게임회사 이름처럼, 폭력적인 괴물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의 스토리를 다룬다. 미셸은 직원들에게 “플레이어의 손에 진하고 따뜻한 피”가 느껴지도록 만들라고 요구한다.

실제 미셸의 아버지는 미셸이 어렸을 때 연쇄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갇힌 상태다. 미셸은 아버지를 저주한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심리적 안정을 찾고 사회적 성공을 거뒀다. 경찰에 성폭행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기자들이 달려들어 자신의 과거사를 들춰낼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미셸은 인생 전체를 망치게 했던 아버지에 이어 정체불명의 폭력적 괴한과 맞닥뜨리는 위기에 처한다. 두 번째 크로노스가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셈이다. 이제 미셸은 자신이 만드는 게임처럼 “진하고 따뜻한 피”가 느껴지는 복수에 나선다.

미셸은 힘이 없는 여성이고, 괴한은 큰 체구의 남성이다. 현실적으로 일대일로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셸은 평소 못 마땅하게 여겼던 아들 뱅상(조나스 블로켓)의 힘을 이용한다.

뱅상은 소위 말하는 ‘찌질남’이다. 차가 고장나 출근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여자친구에게도 구박을 받으며 끌려다닌다. 갓 태어난 아이는 흑인의 피가 섞여 있다. 누가 봐도 다른 남자의 아이인데도, 뱅상은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한다. 대책 없는 뱅상에게 한 가지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식 사랑이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좋은 아빠가 될 자신감”이 있다(뱅상은 크로노스처럼 자식을 잡아먹지 않을 것이다. 유전적 동질성이 없기 때문이다).

뱅상은 괴한을 물리치며 미셸의 신뢰를 얻는다. 이것은 곧 삶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결국 미셸은 ‘괴한 퇴치 게임’을 통해 아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꿨다.

이제 나머지 남자들 차례다. 전 남편 리처드(샤를 베를링)는 미셸과 이혼한 이후 친구처럼 지내는데, 현재 백수로 살고 있다. 미셸은 리처드의 게임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그에게 ‘일거리’를 준다. 리처드는 이제 ‘경제적으로 자립’할 것이다.

친구 안나의 남편 로버트(크리스티안 바클)는 미셸과 내연 관계다. 로버트는 미셸과의 성관계를 즐긴다. 미셸이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말하는데도, 그는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미셸이 안나에게 사실을 털어놓자, 로버트는 곤경에 빠진다. 바람 피우는 남자에 대한 미셸의 응징이다.

미셸 회사의 부하직원은 미셸이 성폭행 당하는 그래픽 동영상을 제작해 뿌렸다가 미셸에게 발각된다. 그도 미셸에게 정신적 폭력을 가했다. 그는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

종신형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연쇄살인범 아버지는 미셸의 방문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미셸은 드디어 크로노스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폭력적(괴한, 아버지, 부하직원)이고, 위선(로버트)적이고, 나약(리처드, 뱅상)하다. 남자들의 이러한 성향은 미셸을 평생 괴롭혔다. 그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모든 사건을 클리어하게 처리한다. 크로노스처럼 미셸을 잡아먹을 듯한 남성은 모두 정리됐다.

라스트신은 미셸이 남성의 세계와 작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제목 ‘엘르’는 불어로 ‘그녀’라는 뜻이다. 여성과의 연대만으로도 그녀의 남은 생은 충만할 것이다.

[사진 제공 = 소니픽처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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