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연인’, 제인 마치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이유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과 스물 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열여덟 살에 나는 늙어 있었다.”(소설 <연인> p10)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0대 시절 베트남에 머물며 경험했던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 <연인>에 담았다. 그는 첫사랑과 헤어진 이후 18살에 늙었다. 사랑을 잃으면 늙는가. 감수성이 예민했던 뒤라스는 그랬다.

<연인>은 가난한 10대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30대 중국인 남자의 격정적인 로맨스를 그린 소설이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콩쿠르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뒤라스가 70살 때, 38살 연하의 애인 얀 안드레아에게 구술해 완성된 소설이다. 뒤라스는 70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시적인 감수성으로 이국적 공간에서 이뤄진 불가능한 사랑의 매혹을 관능적으로 그려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은 1992년 뒤라스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겼다. 여주인공은 “세상을 지루해하는 듯한 분위기와 반항기 어린 눈동자”를 가진 제인 마치(개봉 당시 19살)를 캐스팅했다. 제인 마치는 순수하고 퇴폐적이고 농염한 소녀를 빼어나게 연기했다.

소녀는 중국인 남자(양가휘)를 따라 시장에 있는 ‘독신자의 방’을 찾아간다.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 베트남 토속 음식이 코를 찌르고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리는 공간이다. 이들은 서로의 몸을 맹렬하게 탐닉한다. 예술이나, 외설이냐는 논란이 일었을 정도로, 이들의 베드신은 화제를 모았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은 이 과정에서 원작에 없는 설정을 넣었다. 소녀가 독신자의 방에 있는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이다. 극 후반부에 소녀는 한번 더 물을 준다.

소녀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행위는 노예근성으로 살아가는 중국인 남자에게 사랑의 생명수를 붓는 것이다. 남자는 돈 많은 아버지의 노예다. 아버지가 시키는대로만 살아야한다. 결혼도 아버지가 정해준 여인과 해야할 처지다. 탈출구 없는 감옥에 사는 신세다. 그는 소녀를 만나 생애 처음 자신의 의지대로 사랑에 빠진다.

뒤라스는 소설에서 남자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 그에게 말해 주었다. 자신 안에 본질적인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그는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그를 위해 이야기해 주었다(p55).”

“나는 그가 자기 어버지와 맞서서 나를 사랑하거나, 나를 아내로 맞아들이거나, 나를 데리고 도망칠 용기가 없음을 깨닫는다. 두려움을 넘어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곧잘 운다. 그의 영웅심, 그것은 바로 나이고, 그의 노예근성,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다(p63).”

이들은 헤어질 운명이었다. 남자는 예정대로 결혼하고, 소녀는 프랑스로 떠나 훗날 작가가 된다. 영화에서 소녀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쇼팽의 왈츠를 듣고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뒤늦게, 중국인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늙었다.

남자는 소녀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과 수많은 밤을 보냈지만,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소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자의 사랑은 길고 오래 남는다. 비록 다른 여인과 살고 있을 지라도, 그는 소녀를 마음 속에 영원히 봉인했다. 누구도 그 봉인을 해제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는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 제공 = 팝엔터테인먼트]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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