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동의 씨네톡]‘헤일, 시저!’, 코엔형제의 ‘영화란 무엇인가’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코엔 형제의 모든 영화는 과거가 배경이다. 이들은 “과거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과거를 스토리의 배경으로 삼으면 더 심도 있게 허구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더 먼 과거로 떠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1980년대 초, ‘시리어스맨’은 1967년, ‘인사이드 르윈’은 1961년, 그리고 ‘헤일, 시저’는 1951년이다(중간에 서부극 ‘브레이브’도 찍었다).

이 영화는 코엔 형제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고전영화에 헌사를 바치는 작품이다. 자신들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놓았다.

먼저 스타일 측면에서 ‘헤일, 시저!’는, 조금의 과장을 보태면 ‘할리우드판 시리어스맨’이다. ‘시리어스맨’은 카오스에 빠진 한 남자의 눈물겨운 분투기인데, ‘헤일, 시저’의 조슈 브롤린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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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피틀 픽처스의 ‘해결사’ 에디 매닉스(조슈 브롤린)는 법망을 피해가면서 모든 사건 사고를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어느날 영화 ‘헤일, 시저!’ 촬영 도중 주연배우 베어드 휘트록(조지 클루니)이 납치된다. 정체불명의 단체 ‘미래’는 10만 달러를 몸값으로 요구한다.

휘트록의 행방불명에 이어 수중발레영화 ‘조나의 딸’로 컴백을 앞둔 디애나 모란(스칼렛 요한슨)이 러브 스캔들을 고백하고, 첩보 수사극 ‘즐겁게 춤을’을 준비 중인 명감독 로렌스 로렌츠(랄프 파인즈)는 호비 도일(엘든 이렌리치)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항의한다. 가십 칼럼니스트 쏘라 대커와 테살리 대커(틸다 스윈튼 1인 2역)는 번갈아가며 폭로기사를 내겠다며 매닉스를 들들 볶는다.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정신 없이 터지는 각종 사건 사고에 넌덜머리가 난 매닉스는 항공업체가 제시한 거액의 스카웃 제의에 귀를 쫑긋 세운다.

코엔 형제의 영화세계를 압축하는 말은 ‘부조리와 난센스’다. 세상은 조리에 맞지 않는 일이 시시때때로 벌어지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의 에베레트 율리시즈 맥길(조지 클루니)은 “인간의 정신에서 논리를 찾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야”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가 코엔 형제 영화의 핵심이다(코엔 형제는 2000년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를 만들면서 조지 클루니에게 ‘헤일, 시저!’의 아이디어를 들려줬고, 16년 만에 영화를 만들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가 꼬였던 일이 갑자기 풀렸던 ‘시리어스맨’의 래리 교수처럼, 매닉스의 골치 아픈 일들도 한꺼번에 해결된다(래리가 3명의 랍비를 찾았듯이, 매닉스도 랍비를 포함한 4명의 종교 지도자를 만난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리어스맨’ ‘인사이드 르윈’이 삶의 고통은 계속 될 것이라고, 그런 일들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하며 냉소적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헤일, 시저!’는 모든 것이 말끔하게 낭만적으로 끝난다.

이러한 결말은 코엔 형제의 세계관이 변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영화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애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뭉클함마저 안긴다(코엔 형제는 “이 영화를 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사랑을 받았던 장르를 다시 다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헤일, 시저!’는 5개의 서로 다른 장르를 ‘극중극’ 형태로 담아내는데, 이는 그 자체로 고전영화에 대한 러브레터다. 특히 호비 도일이 주연으로 데뷔하는 서부극 ‘게으른 달’에서 한 배우가 우스꽝스럽게 물에 빠질 때 관객이 웃는 장면은 프레스턴 스터지스 감독의 ‘설리반의 여행’(1941)의 오마주다.

할리우드 유명 영화감독 설리반(조엘 맥크리어)은 대공황 시대 하층민의 고난을 다루는 사회극‘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코엔 형제는 스터지스를 기리기 위해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를 위해 빈털터리로 여행을 떠났다가 부랑자의 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는다. 그 부랑자는 설리반의 신분증을 갖고 있다가 열차 사고로 사망하는데, 언론은 설리반이 미스터리하게 죽었다고 보도한다. 할리우드는 설리반의 장례식까지 치렀다. 그 시각, 설리반은 다른 주에서 철도 노동자와 시비가 붙어 폭행죄로 6년형을 선고 받고 꼼짝없이 강제 노역에 처해진다.

설리반은 교회에서 디즈니의 만화영화를 보다가 재소자들과 함께 크게 웃는 자신을 발견한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지금 내가 웃는거 맞냐?”고 묻는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는 꾀를 내어 자신이 설리반을 죽였다고 나서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아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한 뒤 할리우드로 돌아와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대신에 코미디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스스로 자신을 죽임으로써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다.

매닉스가 흔들린 것도 영화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TV의 대중화로 영화계는 타격을 입었고, 항공업계는 달콤한 거래를 제안했다. 매닉스는 영화계 은퇴를 놓고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다가 옳은 일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휘트록이 십자가의 예수 앞에서 긴 대사를 읊다가 끝내 생각해내지 못한 단어도 믿음이었다.

코엔 형제에게 영화란 고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다.

[사진 제공 = UPI]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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