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의 역설, '희생번트 최소 2위'가 던진 메시지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이겨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두산은 23일까지 희생번트 21개로 최소 2위. 희생번트를 가장 많이 시도한 한화가 53개인 걸 감안하면 두산의 희생번트는 확실히 적다. 김태형 감독은 희생번트 대신 강공을 선호한다. 절체절명의 승부처에서 작전 없이 타자들에게 믿고 맡기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두산 타자들의 임기응변능력이 빼어나기 때문이지만, 김 감독의 색깔이기도 하다. 두산은 지난해에는 84개로 희생번트 최다 2위였다.

그런 김 감독이 22일 잠실 SK전서 무려 4차례나 희생번트를 시도했다. 그 중 2차례 득점으로 연결됐다. 희생번트를 선호하지 않는 김 감독으로선 상당히 이례적인 지시. 번트를 시도한 타자들은 김재호, 정진호는 물론, 중심타자 양의지, 민병헌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 감독은 23일 잠실 SK전을 앞두고 "이겨야 한다는 메시지였다"라고 했다. 희생번트가 적은 팀에서 나온 역설적인 메시지였다.

▲희생번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희생번트는 소극적인 작전으로 여겨진다. 각종 통계전문사이트들은 무사 1루에서 희생번트보다 강공을 시도하는 게 득점확률이 오히려 높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간 KBO리그에 타고투저 광풍이 불었다. 올 시즌은 약간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각 팀 벤치들은 승부처에서 번트로 1점을 짜내는 것보다는 강공으로 2~3점 이상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마운드가 불안해 찬스를 잡으면 대량득점을 해야 승리확률이 높다는 걸 알기 때문.

그런데 현장에선 희생번트가 꼭 필요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일단 찬스에서 희생번트를 잘 대는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경우 번트를 시도할 수 있다. 사실 희생번트는 매우 어려운 기술. 투수가 희생번트를 간파, 몸쪽으로 빠른 공을 던질 경우 번트를 대는 게 쉽지 않다. 또한, 희생번트에 대비하는 수비 시프트도 상당히 발전했다. 때문에 희생번트를 잘 대는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 벤치는 희생번트를 노릴 수 있다.

한 야구관계자는 "경기 정황상 딱 1점이 필요한 상황이 있다. 뭐라고 정형화된 게 아니라 감독들이 직감적으로 느낄 때"라고 했다. 그럴 경우 희생번트를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이 관계자는 "타자들이 심리적으로 쫓기거나 페이스가 좋지 않을 때는 일단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를 보내는 게 후속 타자들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라고 했다. 단순히 통계, 기록만으로 희생번트를 경시할 수 없는 이유.

▲두산 케이스

김 감독은 "최근 타선이 하향세였다. 전반적으로 잘 맞지 않고 가라앉고 있었다. 연속 안타가 잘 안 나온다"라고 했다. 실제 두산 타선은 침묵 모드였다가 23일 9점을 뽑아내며 반등했다. 최근 3연패의 원인은 승부처에서 터지지 않은 타선. 실제 두산은 팀 타율 0.278(5위), 팀 득점권 타율 0.259(7위)로 인상적이지는 않다. 개개인의 타격능력이 좋은 걸로 인식되는 두산 타선이지만, 사실 2%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또 하나. 두산 타선은 최근 베스트라인업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김 감독은 "홍성흔은 꼭 필요한 선수"라고 분류한다. 지금은 타격부진으로 2군에 내려갔지만, 그 커리어와 테크닉을 갖춘 후배들이 많지 않다는 판단. 여기에 사실상 시즌 내내 외국인타자 없이 타선을 꾸려가고 있다. 때문에 최근 두산 클린업트리오에는 민병헌, 양의지, 오재원 등이 자주 들어선다. 셋 모두 타격 재능이 뛰어나지만, 수비 부담이 큰 양의지는 하위타선에, 발 빠른 민병헌과 오재원은 중심타선도 좋지만, 상위타선에 배치되는 게 좀 더 어울린다. 타선의 전반적인 힘이 떨어진 상황. 3연패라는 위기에서 희생번트를 충분히 시도할 만 했다.

김 감독은 "사실 번트는 김재호(9번타자)가 가장 많이 댔다. 하지만, 민병헌이나 정수빈도 번트를 잘 대고 홍성흔도 의외로 잘 댄다. 번트를 할 땐 해야 한다"라고 했다. 번트 테크닉을 갖춘 타자들이 있는데 굳이 번트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승부처에서 희생번트는 벤치의 의도에 따라선 가장 적극적인 작전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건 팀 승리. 과정이야 어찌됐든 3연패 위기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김 감독의 말 속에 뼈가 있었다. 팀 승리를 위해선 어떤 타자든 희생번트를 시도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 최소 2위일 정도로 희생번트를 선호하지 않는 김 감독이 선수들에게 보낸 역설적인, 그리고 모두의 허를 찌르는 메시지였다. 두산 야구에서 1경기 희생번트 3~4차례 시도는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

[번트를 댄 두산 타자들.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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